망부석
우리나라에는 망부석(望夫石)의 설화가 곳곳에 있습니다. 절개 굳은 아내가 집을 떠난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 죽어서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말합니다. 특히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 : 363~418 추정)의 아내가 치술령(述嶺)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굳어져 된 바위가 되었다는 설화가 유명합니다.
그 망부석을 노래한 가수 김태곤의 노랫말이 가슴을 때립니다.
<망부석>
「간밤에 울던 제비 날이 밝아 찾아보니/ 처마 끝엔 빈 둥지만이/ 구구 만리 머나먼 길/ 다시 오마 찾아가나/ 저 하늘에 가물거리네./ 헤에야 날아라/ 헤야 꿈이여/ 그리운 내 님 계신 곳에/ 푸른 하늘에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깊은 밤 잠 못 이뤄 창문열고 밖을 보니」
박제상은 신라의 충신입니다.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 · 도원(挑園) · 석당(石堂) 등이지요. 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입니다.《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제상은 삽라군(羅郡)의 태수 직을 수행하였습니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이어서 일본 야마토에 볼모로 가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습니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일본 인교 천황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망부석(望夫石) 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박제상의 부인에 얽힌 설화입니다.《삼국유사》의〈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에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王旣見寶海, 益思美海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 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 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왕이 이미 보해(복호)를 만나자, 미해(미사흔)의 생각이 더하여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니, 눈물을 흘리며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마치 한 몸에 팔이 하나인 듯, 한 얼굴에 눈이 하나인 듯,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었으니, 어찌 감히 괴롭지 아니한 일인가.” 그때에 제상이 그 말을 들으니, 다시 절하고 하직하여 말을 탔다.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바로 율포(栗浦) 물가로 향하니, 그의 처가 이를 듣고, 말달려 율포로 좇아가니, 이미 지아비가 배 위에 올라있었다. 아내가 간절하게 부르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며 떠났다.」
같은 편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 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 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述神母, 今祠堂存焉.」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이를 듣고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누워서는 크게 부르짖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의 이름을, 장사(長沙)라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척이 부축하며 돌아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르게 되었다. 오랜 후에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생을 마쳤다. 그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존재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402년(실성왕 1년) 일본에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고구려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습니다. 그 후, 417년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訥祇王)이 왕위에 오르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려 했습니다. 왕은 신하들의 천거를 받아 당시 삽량주간(良州干 : 삽량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으로 명망이 높던 박제상을 사절로 보냈습니다.
418년,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長壽王)을 회유해 복호를 구출해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 박제상은 다시 일본에 가서, 자신이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 온 사람처럼 속이고 들어가, 미사흔을 구출해 신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일본인들에게 잡혔지요.
일본의 왕은 “일본의 신하가 되면 상을 내리고, 계림(鷄林)의 신하로 남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과 회유를 했습니다. 그러나 박제상은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투항을 거부했습니다. 일본 왕은 박제상을 유배를 보냈다가 화형으로 죽였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망부석의 주인공 박제상의 처 김씨 부인은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일본이 보이는 바닷가에 나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돌이 된 것입니다. 후인들이 이를 망부석(望夫石)이라고 부릅니다.
어떻습니까? 만고충신(萬古忠臣) 박제상의 아내 김씨 부인 역시 만고열녀(萬古烈女) 구원(久遠)의 여인상이 아닐까요?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충신과 열녀가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이하여 이 시대에 들어와 충신과 열녀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는 것일까요?
옛 선인이 ‘기후가 추운 뒤에야 송백(松柏)의 절개(節槪)를 알고, 환란(患亂)이 있은 후에야 공부의 참된 힘을 얻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나라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에 휩 쌓여 있는 형국입니다. 이 나라에서 오랜 시간 부귀영화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 대단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만고충신 만고열녀가 너무 그리워 이 망부석의 고사를 더듬어 보네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6월 1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