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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아름다운 인간관계..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아름다운 인간관계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6/21 10:03

▲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 칼럼니스트아름다운 인간관계

이 세상에서 타인으로부터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호감을 주고 싶어 하며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기만 하는 것은 저축도 하지 않은 채 은행에서 돈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나쁜 면만 본다면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없지요. 아무리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말을 잘한다 해도 주위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면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꾸미려 해도 그대로 전달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인간관계는 오직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어떻게 만들어 가면 좋을까요? 고사성어(故事成語) 중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하라는 뜻이 숨어있지요.

 

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은, 춘추전국시대 때 일어났던 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투에서 마지막 승자가 된 월나라 왕 구천(句踐)에게는 두 명의 충직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범려(范)와 문종(文種)이었지요.

 

당시 월왕 구천(句踐)은 경솔하게 오나라를 침략했다가 대패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월왕 구천은 문종과 범려라는 인재를 얻어 힘을 비축한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월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월왕 구천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두 신하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지혜를 모았습니다. 한마디로 구천은 월나라의 왕이었지만 두 스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왕과 신하의 위계를 떠나 파격적으로 사제지간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이기고 강성해 졌을 때 범려는 문종(文種)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릇 월왕 구천(句踐)이라는 사람은 목이 길고 입이 튀어 나와 매의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을 하는 상이오. 이 같은 상을 한 사람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어려움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만일 그대가 그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장차 그대를 죽이고 말 것이오. 그러니 어서 이 왕궁을 떠나 그대의 살길을 도모 하는 게 좋겠소,”

 

그러나 문종은 범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범려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문종(文種)을 버려두고 혼자서만 월왕을 떠났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범려가 예언했듯이 월왕 구천은 문종에게 “그대가 내놓은 비밀스런 계책으로 오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소 그대가 말한 9가지의 계책 중 지금까지 겨우 3가지만을 사용하였는데도 강대한 오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놀라운 계책이오. 그런데 나머지 6가지는 아직 그대가 구사하지도 않고 있소.

 

남은 여섯 가지 계책 중에는 나를 토살(討殺)하여 왕위를 찬탈하는 계책도 있을 수 있으니 바라건대 나머지 계책은 나를 위해 죽어 지하에서 오나라를 도모하는데 써주기 바라오.” 하면서 월왕 구천은 문종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지요. 한마디로 문종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서야 범려의 말을 듣지 않은 문종은 뒤늦은 후회를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문종은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남영 출신 재상이 오히려 월왕의 포로가 되었구나. 이후 멸망하는 나라의 충신들은 반드시 나를 들먹일 것이다.” 어떻습니까? 범려가 살아남은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면 ‘사이가 좋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이’라는 것을 한자어로 말하면 ‘사이 간(間)’ 자를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사이가 좋다’는 것은 서로가 빈 틈 없이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적절한 거리 즉, 간(間)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찰떡궁합’과 같은 것을 이상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호의 빈틈이나 거리가 없이 딱 붙어 다니는 것을 ‘사이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사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적당한 인격(人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리다 보면 친밀한 것 같은데 결국은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간(人間)과도, 자연(自然)과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관계란 멀리 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채 소원해지고, 너무 가까이 하다 보면 하루아침에 실망하여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그것이 오해든 배신이든,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실망은 더 클 수 있는 법이지요.

 

그래서 옛 선인들은 ‘불가근불가원’ 즉,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비결은 바로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를 항상 유지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수도승(修道僧) ‘아나가리카 고빈다’는 “산(山)의 위대함은 거리를 두어야 보인다. 산의 모습은 직접 돌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서 직접 보면 실망을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남에게 존대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은 홀대받는 일을 더 하니 어찌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의 존대를 얻는 방법은 곧 내가 먼저 저 사람을 존대하며 위해주는 것입니다. 적당한 사이를 두고 내가 그를 존대해주면, 그도 나를 존대해주고 위해주며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어 갈 수 있지 않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6월 2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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