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동심
정교 동심(政敎同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야합하지 않고, 일심 합력하여 인류를 구제하고 평화세계를 건설하자는 주장이지요. 원불교의 입장에서 종교의 역할은 한 가정에 있어서 자모(慈母)의 역할이고, 정치는 엄부(嚴父)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종교는 동남풍(東南風)에, 정치는 서북풍(西北風)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원불교의 주장은 ‘제정일치(祭政一致) · 정교분리 · 정교야합’이 아니라 정교 동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정치 종교의 지도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대 공심(大空心)과 대 공심(大公心)’을 갖추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불교의 3대 종법 사를 역임하신 대산종사(大山宗師)는 ‘대 공심 대 공심’에 대해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세계에서 가장 큰 산을 태산(泰山)이라고 하나, 그 산을 해부해 보면 토석지합(土石之合)에 불과하며, 또 세계의 대인(大人)을 사대성인(四大聖人)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대성인이 되셨는가를 살펴보면, 두 가지 마음이 제일 많이 뭉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 공심과 대 공심’이다. 시방을 다 담고도 남는 마음, 시방을 다 좋게 해주고도 남는 마음이 대 공심, 대공심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다 각기 소유물이 있고 모든 만물도 주인이 있다. 그러나 허공만은 주인이 없다. 이 허공은 성인이라야 능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대산종사께서 평소 제일 많이 하신 법문이 ‘대 공심 대 공심’ 말씀입니다. ‘마음을 크게 비우자, 또 내 마음을 공익정신으로 충만하게 하자’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훈련하면 우리중생의 문패가 불보살의 문패로 분명히 바꿔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산 종사님이 계룡산 삼동 원(三同院)에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대산종사께 갔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니 “야, 여기 달라진 것이 없냐?” 하시기에, 다들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옆집을 사서 담장을 헐었더니 이렇게 넓어졌다.” 고 하셨지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담장이 있습니다. 욕심의 담장, 집착의 담장, 이념의 담장, 파벌의 담장 등 입니다. 이 담장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범부중생입니다. 그러나 이 담장을 헐면 광대한 천지를 볼 것이며 우주를 안을 수 있는 광대한 심량(心量)을 얻는 것입니다. 마음의 담장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불보살이 되는 것이니까요.
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 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잠심(潛心), 잠심, 잠심, 아래로 마음을 잘 가라앉혀라. 우리는 현재 들떠있다. 마음이 늘 흩어져 있다. 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정심(靜心)공부를 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늘 좌선과 기도 독경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정관(正觀)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관’은 고요하게 사물을 바라다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정견(正見)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져야 바르게 보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어두울 명(冥)’ 자, ‘생각 想(상)’ 자입니다. ‘생각을 어둡게 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을 지우는 것’ 이것이 명상입니다. 번뇌 망상이 생기면 지우고 가라앉혀서 정견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바로 정관일 것입니다.
고요한 가운데 밝은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지혜’, 곧, ‘근본지(根本智)’라 합니다. 그 지혜등불로 문제를 맑히고 밝히면, 천통(千通) 만 통(萬通)이 되어 부처님처럼 대각(大覺) 원각(圓覺)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라하는 데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일을 놓고 잡고, 마음을 내고들이고 하는 것에 자유를 얻자는 것입니다. 보통은 한쪽에 붙잡혀 자유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자는 것입니다. 대 공심(大空心)을 훈련해서 결국은 마음의 자유를 얻는 불보살로 나를 바꿔가야겠습니다.
그 다음은 대 공심(大公心)입니다. 공익정신(公益精神)으로 살아가자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 자식이 어울리고, 사회에서 어울리고, 모든 사람이 어울려 사는 것입니다. 자기 볼일만 딱 챙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정(情)이 없습니다. 옆 사람에게 마음을 써주고, 무엇인가를 배려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주인정신이 공익정신입니다. 가정의 법도, 조직의 규칙을 차분하게 천천히 주도적으로 지켜나가면 그것이 바로 공심의 첫걸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고독한 사람이 많습니다. 외롭고 가난하고 병든 분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동행할 수 있는 보살행이 바로 공심(公心)입니다.
대 공심(大公心)은 어디를 가든지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주인으로, 사회의 주인으로 내가 처해있는 곳곳마다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보통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공(公)을 빙자해 사리(私利)를 취하는 사람, 먼저 공을 챙기고 뒤에 자기 일을 하는 사람, 오직 공(公)을 위해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삼세(三世)의 모든 성자는 이렇게 지공무사한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대산종사께서 늘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공을 들여라 그러면 반드시 중생의 문패가 성자의 문패로 바꿔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대 공심(大空心) 대 공심(大公心)의 주인이 되도록 변화를 주도해 가야 합니다. 그럼 반드시 대산종사께서 염원하신 대성자가 이 땅에 무수히 배출될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나 대개 눈앞의 욕심과 이해관계에 흔들릴 때가 많은 법입니다. 이것은 아직 대 공심 대공심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삶은 비우고 또 비우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사적인 것보다 공익을 위한 선택을 하는 삶’을 가져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대공심의 심법(心法)이 있어야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위해 인내할 수 있고 복잡하게 얽힌 정국에서도 바른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 역시 이 빈 마음과 공익 심을 양성하는 대 적공(大積功)을 기울여야 만 생령을 제도(濟度)하는 정교 동심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6월 2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