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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실사구시의 종교..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실사구시의 종교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7/05 03:04
▲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 칼럼니스트 실사구시의 종교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사구시! “실제의 일[實事]에서 옳음[是]을 구하다.” 달리 말하면, 진리와 실천의 기준을 실사에서 구한다는 것입니다. 즉, 실제의 일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후한서(後漢書)》<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나오는데, 하간헌왕 유덕(劉德)의 학문하는 태도에서 ‘실사구시’가 유래했습니다. 유덕은 죽은 후에는 헌(獻)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하간헌왕’이라 불렀습니다.

유덕은 고서(古書)를 수집하여 정리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이후 고서적은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 않은 책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오기도 하였지요. 하간 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문인들이 선조들이 물려준 진(秦)나라 이전의 옛 책들을 그에게 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하간 왕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고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조에 들어와서 실학파의 사회개혁 요구는 많은 탄압을 받아 지배층으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실학파들은 실사구시의 측면만이 엄격한 학문방법론으로 추구되었지요. 그 실학의 대표적인 인물이 북학파 계열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입니다.

김정희는 실학자들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계승하여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선명히 하고 금석(金石) · 전고(典故) 등에 관한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학문 태도는 우리나라 실학파(實學派)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있습니다. 다산의 경우 경전 해석에 있어서 주자학(朱子學)의 체계를 극복하는 길을 옛 공자(孔子)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서 찾고, 그 방법으로서 철저한 고증 · 실증적 태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주희(朱熹)와는 다른 경전 해석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맞는, 생활에 맞는 또 누구나 알 수 있고 대중화된 실사구시의 진리적 종교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과거 불가(佛家)에서 불상(佛像)을 모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불상은 다만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모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 그 당체(當體)를 믿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믿는 것이지요.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人形)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심체라는 것은 광대무량(廣大無量)하여 능히 유(有)와 무(無)를 총섭(總攝)하고 삼세(三世)를 관통하는 것이지요. 곧 진리는 천지만물의 본원(本源)이며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 처(入定處)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유가(儒家)에서는 태극(太極) 또는 무극(無極)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自然) 혹은 도(道)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이 진리를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이라 하고, 우리 원불교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호칭이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종교의 신앙의 대상은 비록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究竟)에 들어가서는 다 이《일원(一圓)》의 진리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종교라 이름 하여 이러한 진리에 근원(根源)을 세운 바가 없으면 그것은 곧 사도(邪道)인 것입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에 진리 당체를 믿는 실사구시의 종교가 아니면 이 세상을 구원(救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적 종교는 어떻게 신앙하면 좋을까요? 그건 우선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福樂)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항상 경외심(敬畏心)을 놓지 말고, 존엄(尊嚴)하신 진리를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敬虔)한 태도로 천만 사물을 대하고, 천만 사물에 직접 불공(佛供)하기를 힘써서 현실에서 복락을 장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신앙을 말하자면, 편협한 신앙을 원만한 신앙으로 돌리고, 미신적인 신앙을 돌려 사실적인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사구시적인 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그러면 진리적 수행(修行)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첫째, 진리인《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체 받아서 자신의 인격을 양성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본말(始終本末)과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같이 마음 가운데 아무 사심(私心)이 없고, 애욕(愛慾)과 탐착(貪着)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性品) 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용심 법(用心法)을 배우는 것입니다.
진리와 같이 모든 경계(境界)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원근친소(遠近親疎)에 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삼학공부(三學工夫)입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를 삼학이라 합니다. 그리고 옛날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정혜(戒定慧)도 삼학인 것입니다. 또한 일원진리의 원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진리의 체성(體性)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입니다. 그리고 일원진리와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인 것입니다.
이 삼학공부를 지성(至誠)으로 하면 학식유무에도 관계가 없고, 총명(聰明) 여하에도 관계가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다 성불함을 얻어 영생의 복락(福樂)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조금 어렵지요?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복 받기를 좋아하나 복 짓기는 싫어합니다. 또 화(禍) 받기는 싫어하나 죄 짓기는 좋아 합니다. 이것이 다 화복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실사구시의 종교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이 아닐 런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7월 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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