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이해학목사님의 삶이 올곧게 담겨 있는 주민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게 됨을 기뻐합니다. 저는 한 달 전 7년 임기제에 중임으로 제한되어 있는 향린교회에서의 14년의 사역을 마치고 지금은 법적으로는 교회 담임을 하지 않는 무임목사이지만, 실제는 주말마다 부산의 믿음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까지 가게 된 이유는 저와 같은 시기에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던 김영수목사님이라는 분이 25년 전에 이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쉽게 말해 부산의 주민교회라 칭할 만큼 80년대 민주화와 노동인권을 위해 일한 대표적인 민중교회였습니다.
불행히도 목사님께서 15년 전 50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 십여 명의 교인들이 흩어지지 않고 계속 예배 공동체를 지켜 왔습니다. 때로는 설교를 담당해주시는 목사님이 계셨던 적도 있지만, 많은 경우 저의 설교문을 갖고 예배를 드려왔던 것입니다. 이년이 지나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난 적도 없는 분들이었지만, 제게 있어서는 또 다른 향린교우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제4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고, SNS를 통해 예배를 드리는 디지털 교인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데, 어찌 보면 이런 범주에 속하는 새로운 교회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쌍둥이교회]
주민교회는 향린교회는 70년대 이후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이해학목사님은 물론 민중신학의 거두이자 향린교회 창립 교우이셨던 안병무교수님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옥살이를 한 홍근수목사님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교회는 일란성 쌍둥이교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세계교회 특히 북미의 여러 주류교단들이 정한 성서일과에 따라 본문을 정하고 설교를 하여오고 있습니다. 주민교회는 기장 총회의 성서일과를 따르고 있는데, 구약과 시편 서신서와 복음서의 4개의 본문 선택 그리고 3년 주기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는데, 북미의 성서일과는 한 책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데 반해 기장은 본문이 뒤섞여 있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북미교회의 성서 일과는 첫해는 마태복음, 두 번째 해는 마가복음 세 번째 해는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대림절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등의 특별 절기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기장은 한해에도 4개의 복음서가 섞여 있습니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일과 복음서 본문은 마태복음 10장 40절로 42절까지로 매우 짧고 그 뜻이 분명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 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또한 상을 얻을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라는 단어 대신에 다른 곳에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 ‘제자의 이름’으로라는 부분만 빼고 나면 이 말씀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배경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앞부분을 알아야 하기에 16절로 20절까지를 첨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스승 예수로 인해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 중의 핵심 말씀입니다. 그런데 16절 “이제 내가 너희를 보냄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이 구절만은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이 말씀은 너무 잘 알려진 말씀이긴 한데,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석서를 보아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부터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한 주간 연구를 하였고 제목도 ‘뱀과 비둘기에 숨은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교우 여러분들도 이 얘기는 처음 들어보실 것입니다.
[에덴동산과 뱀]
우리가 비둘기의 순결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뱀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창세기 3장 의 에덴동산 이야기에 다르면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에 빠트리고 결국은 그래서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하도록 하는 말하자면 하느님과 적대하는 사탄의 대명사일뿐더러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고 뱀 또한 저주를 받아 여인은 물론 여인의 후손 곧 모든 인간과 철전지 원수지간이 되어 인간은 뱀을 뱀은 인간을 죽이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뱀은 사탄의 대명사요 인간과 가장 적대적인 동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뱀의 지혜를 배우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말씀을 한 것입니다.
뱀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선악과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관련하여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얘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아는 얘기이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원죄의 근거가 되는 말씀인데,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여러 의문점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데, 죽지는 않았지요. 물론 이를 영적인 의미에서 죄 가운데 머물게 된다는 정죄 개념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항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그 열매를 먹으면 죽을 나무는 애당초부터 인간이 접근할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쳐놓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 두지 말았어야 했을 것 아니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면 먹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인데,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약 올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선악과나무에 연계된 질문들]
이에 대해 하는 ‘아! 그건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로봇이 말을 잘 듣는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로봇이 아닌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아담과 이브가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 우리는 하와가 항의했듯이 뱀 또한 하느님이 만드신 것 아닙니까? 왜 악한 뱀을 만드셨습니까? 단순한 책임전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책임론을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여기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아니, 절대 선이신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어떻게 악한 것이 만들어 질수 있느냐?‘는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또 한 번의 설교가 필요하니 여기서는 그치겠습니다만, 욥기가 이에 대해 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나무 이야기에서 저에게는 이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선악과의 열매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열매를 먹는 것이 도대체 왜 잘못이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요? 자녀들을 가르칠 때, 무엇을 가르칩니까? 선한 일은 하도록 하고 악한 일은 하지 않도록 하는 것 아닌가요?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자 사람됨의 목적이 아닌가요? 설교 또한 권선징악적인 윤리도덕적인 교육적 측면 또한 매우 강합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성서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고 경고하시는 건가요? 이거 말씀의 모순 아닌가요?
우선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지요? 어떤 일이 선인지 악인지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같은 판단을 갖고 있나요?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흔히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양심이 다 같나요? ‘난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이에 동의합니까? 쉽게 말해 요즘 장관 후보자들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진행 중인데, 의원들이 ‘이거이거 나쁜 일했어, 당신은 장관이 될 자격이 없어.’라고 물을 때, 후보자가 ‘난 양심에 어긋난 일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면 문제가 없는 건가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듯이 선과 악을 개인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사회에서는 판사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판사들도 개인에 따라 또 정권에 따라 잣대가 달라지니까 이것도 완전한 제도는 아닙니다만, 하여간 민주사회에서 선악의 구별은 일단 개인이 하고 개인의 의견 차이가 생기면 법원이 이를 판단합니다. 이런 법제도가 생긴 것은 인류 역사에서 보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대 군주시대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최종 주체는 누구였을까요? 군주입니다.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가 내가 곧 국가이다 달리 말해 내가 곧 법이다라는 말도 했다지만, 군주시대에서 선과 악의 판단은 군주 왕이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바로 엊그제까지 자신이 곧 국가요 법으로 착각한 여왕이 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또한 허수아비요 실제는 또 다른 여인이 뒤에 숨어 있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어 국민들의 허탈감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 세계가 놀라는 민주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혁명 곧 촛불혁명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성서해석에 있어 중요한 관점이 있는데, 그건 역사비평입니다. 하나하나의 말씀이 어느 시대에 어떤 상황에서 쓰인 글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전문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조 이야기가 두 개 있는 것은 다 아시지요? 창세기 1장과 2장.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이 제일 나중에 창조되지만, 2장에서는 제일 먼저 창조됩니다. 더구나 히브리어 성서를 보면 1장과 2장의 신의 이름이 다릅니다. 이는 신학적 관점이 다른 것이지 둘이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1장의 신의 이름인 엘로힘(Elohim)의 첫 글자를 따서 E문서, 2장의 야훼/여호와(Jahweh)의 첫 글자를 따서 J문서 이렇게 부르는데, 창세기 1장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형성이 되었고, 창세기 2장은 다윗왕 시대에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이 경고 이야기는 다윗 왕이 우리야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불법적으로 취한 것에 대한 경고이자 심판 선언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와 ‘뱀의 지혜’]
자 이제 뱀 얘기로 돌아갈까요. 아담, 하와 이야기 자체가 당시의 권력자를 향한 비유이듯이 뱀 또한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는 동물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비유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걷다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자 불평을 하지요. 그러자 하느님이 불뱀을 보내 많은 이들을 죽게 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놓으라.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뱀은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고 구원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사적으로 고대의 신전 안에는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 뱀 얘기를 하는 정황은 이렇습니다. ‘보래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리떼 속에서 양은 먹이가 되기 십상인데, 이때 잡혀 먹지 않는 방식으로 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어쩌면 뱀의 약삭빠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22절 이하 말씀에도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박해가 왔을 때 피하는 지혜로 예수께서 뱀을 언급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맞는 듯 하지만, 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군사정권 시절 이해학목사님이나 홍근수목사님께서 피할만한 지혜가 없어서 감옥에 갇히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도 사람들이 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피하라’고 경고했을 때에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히 이루리라.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피하라는 경고를 받으셨지만,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채찍을 들어 당시의 정치종교사회 모든 권력의 핵심이었던 성전 숙청을 감행하시고 이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의 지혜를 따라 살라고 명을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로마의 박해 속에서 다들 순교를 당했습니다.
따라서 뱀의 지혜를 피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광야에서는 장대에 달린 놋뱀의 형상을 보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대시대에는 종교적으로 뱀이 치유와 구원이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군의관들의 오른쪽 견장에 어떤 그림이 새겨져 있는지 아시나요? 왼편 견장에는 계급장이 새겨져 있지만, 오른쪽에는 두 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이는 그리스 시대의 의사였던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상징하는데 여기서 뱀은 치유와 소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왜 뱀이 이렇게 치유와 소생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그건 뱀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허물을 벗기 때문입니다. 뱀은 허물을 못 벗으면 죽습니다. 왜냐면, 몸은 자라는데 허물을 이루고 있는 비늘은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1년에 2~3번 정도 허물을 벗습니다. 성장이 좋을수록 더 자주 허물을 벗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에서 뱀은 옛 것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지혜의 상징 동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이 뱀의 허물벗기를 왜 박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우리의 참 생명은 영원 속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것들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28절 말씀을 읽으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뱀의 지혜란 분명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올 것인데, 그때 거기에 굴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걱정하지 말라. 성령께서 할 말을 다 알려 줄 것이다. 하찮은 참새도 하느님이 지키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이다. 허물벗기를 하는 뱀을 보아, 땅(겉)에 속한 옛 것은 사라지는 것이니 영원한 참 생명을 붙잡고 나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박해와 ‘비둘기의 순결’]
이 관점에서 곧 박해와 관련하여 비둘기의 순결성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흔히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얘기합니다만, 그건 비둘기가 맹금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다른 새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집단거주 습성과 인간과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한 동물들은 서로 싸워서 헤어지면 둘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동료간의 평화가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말씀에 동의하시는 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분도 없으시군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 동의하시는 분은 한분도 없으시군요. 아!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죠? 낭패입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좋은 답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비둘기에 있어 집단거주 습성 보다 더 중요한 습성이 있습니다. 그건 귀소본능입니다.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자기 집으로 정확히 찾아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과학자마다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지구의 자기장을 이용한다는 학설도 있고, 자연환경을 기억 속에 넣어두었다가 활용한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고대시대로부터 비둘기는 오늘날의 전화를 대신하는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비둘기의 순결성을 언급했다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사명이 직접 내려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곧, 박해 가운데서 배워야 할 비둘기의 순결성이란 곧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만을 바라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제가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성서 일과에 따랐습니다. 제가 향린교회 전임 목사로서 주민교회에 와서 이 말씀을 전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말씀 가운데,“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회당에서 너희를 채찍질 할 것이다.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이는 권세 잡은 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장의 주민교회, 향린교회, 한빛교회, 고백교회들은 이 점에 있어 남한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들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은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정치종교권력자들로부터는 박해를 받고 거짓 예언자 하나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서 잘 될 것이라는 축복을 선언합니다. 참 예언자는 우리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전하고 거짓 예언자는 듣기 좋은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주 제 사촌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강남의 유명한 초대형교회의 권사님으로 어머님 때로부터 믿음이 매우 돈독한 분이십니다. 이전에 만나면 은근히 제가 정치사회문제에 너무 관심하는 것이 비복음적인 것인 양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났더니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님 말씀을 예수님 말씀으로 믿고 새벽기도회를 포함하여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돈 내라하면 돈 내고 시간 내라고 하면 시간 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강단에서는 그럴 듯하게 설교한 목사가 실제 삶에서 보여준 여러 잘못된 행위를 보니 이제는 교회 나가기도 싫고 목사 얼굴 쳐다보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많은 대형교회들이 세습이나 재정, 그리고 여성 스캔들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향해 개독교니 먹사니 병신도니 하는 욕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가면 평균 연령이 65세 이상입니다. 40년 전 농촌교회에 가면 어른들은 없어도 아이들은 바글바글했습니다. 40년 후의 교회가 어떠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30년 후 교회가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한 일입니다.
[The Luther Effect(루터의 영향)]
얼마 전 독일에서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THE LUTHER EFFECT>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종교성이 올해 루터의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개신교 역사를 정리한 것인데,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들을 다 말할 수는 없으니, 대륙별로 네 나라를 선정하고, 이 네 나라의 개신교회 역사 그리고 오늘의 교회 모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유럽을 대표해서 스웨덴,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해서 미국, 아프리카를 대표해서 탄자니아, 그리고 아시아를 대표해서 남한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대륙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500년 개신교 역사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남한과 탄자니아는 피선교교회로 남한은 주로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탄자니아는 유럽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에 반해 스웨덴은 대표적인 루터교 국가로 16세기 교회 개혁의 산물입니다. 미국은 17,8세기의 유럽에서의 뿌리가 다른 여러 개신교인들이 새로운 약속의 땅을 찾아가서 세운 나라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이름으로 흑인 노예들을 끌어오고 8백만에 가까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20세기 세계 모든 전쟁의 중심에 서있는 일은 엄청난 죄악이지만, 교회만 본다면 지금 미국교회는 매우 다양한 색깔의 교단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미국이 트럼프로 인해 세계 사람들로부터 개망신을 당하고 있지요.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촛불민중의 저력을 믿고 문대통령이 트럼프의 독선에 맞서 조금 당당하게 처신해주기를 바랬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남한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전이니 어쩌겠습니까? 또 다시 민족 자존심이 손상당하고 말았습니다.
개신교 선교 역사 130년 만에 인구의 20% 이상 가톨릭과 더하면 3분지 1이 넘는 교회성장 역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물론 저는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오르다가 쉬이 사라지기에 교회 퇴보 또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빨리 퇴보할 것이라고 봅니다. 하여간 현재 세계개신교회 역사를 얘기하면서 남한 교회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50대 대형교회 중 절반이 서울에 있으니 말입니다.
[Beacons in a Divided Land(분단된 땅의 횃불들)]
그런데 이 책에서 남한교회의 130년의 선교 역사를 설명하고 나서 오늘의 남한교회를 설명하는데, 그 장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BEACONS IN A DIVIDED LAND”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 만들어 놓은 38분단선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과 중국이 개입한 한국전쟁을 통해 남북은 분단국가가 되었는데, 남한의 교회 또한 둘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남한의 5,6만개가 넘는 교회 중 딱 두 개의 교회만 소개합니다. 하나는 교인수 48만 명의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그리고 이에 천분지 1에 불과한 향린교회입니다. 저는 여기서 향린교회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향린교회와 뜻을 같이하는 주민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통일과 민주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갈릴리 민중목회 지향적인 여러 진보교회들을 포함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향린교회 세상적인 힘으로 보면 약합니다. 주민교회 숫자로 말하면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강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정신을 따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복음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이 4개 나라의 개신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전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가보지 못했지만, 이번 5월말에 2년마다 진행하는 교회의 날 행사에 저희 교회 교우들 약 20여명이 참석을 했고 이곳을 다녀왔습니다. 한국관을 들어가서 왼편으로 가면 대형화면에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 아래에 영어와 독일어 자막이 나옵니다. 내용인즉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할 뿐더러 죽어서는 천국간다’고 하는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설교를 보여줍니다.
오른편으로 가면 향린교회를 소개하는 4개의 전시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악기와 전통음악으로 예배를 드리는 국악예배 소개입니다. 두 번째는 향린교회에 와보신 분들은 이미 보셨겠지만, 교회 외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현수막 3개입니다. 하나는 1991년부터 걸어져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는 것이고 다른 두 개는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이라는 문구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라는 문구입니다. 지난 봄 교회를 방문했던 전시 담당자가 이를 보더니 달라고 해서 당시 걸려 있던 현수막을 주고 같은 것을 다시 걸어놓았습니다.
세 번째는 약 85cm x 75cm 크기의 보라색 천입니다. 여기에는 홍근수목사님이 오랏줄에 매여 있는 그림에 통일목사 홍근수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목사님의 석방을 촉구하는 이백 명의 교인들의 기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2008년부터 815 평화통일주일 예배 때에 했던 십자가입니다. 두꺼운 종이로 크기는 가로 1미터 50cm, 세로 90cm, 폭은 약 20cm 크기입니다, 가로 판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세로 판에는 ‘대한민국’이라고 씌여 있고 십자가 가운데는 한반도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매 평화통일주일 설교 마지막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린 하느님의 명령, 곧 두 막대기에 하나는 북왕국 ‘에브라임’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남왕국 ‘유다’라 쓰고 이를 하나로 곧 통일조국의 비전을 갖으라는 말씀을 읽은 다음에 이 두 개를 하나의 십자가로 만드는 통일비전 예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모두 제 사무실 벽에 세워 있었던 것인데, 이를 보더니 달라고 해서 가져간 것입니다. 혹 11월 안에 베를린을 방문하시게 되거든 꼭 이 역사박물관을 가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려면 넓고 크게 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성공한 것 같아도 죽을 때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이 아닌 영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눈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세계 사람들 모두가 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길 원하실까요? 불교신자도 모슬렘 신자도 세상 사람 모두가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신자가 되길 원하실까요? 사실 유럽에서는 루터 이전에 그런 시대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세시대를 ‘암흑의 시대(the Dark Age)’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도 신의 이름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수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실까요? 지금 모슬렘신앙인들이 중동에서의 미국과 유럽의 살상에 저항해서 유럽 곳곳에서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엊그제 중동 이슬람국가 6개 나라의 여행을 제한했습니다.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가 계속 다투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아가길 원하실까요? 아니면 신의 이름은 달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의 가족처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주여! 주여! 손을 들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일까요? 아니면 삶과 행실에 있어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일까요?
한편, 지난 9일 언론협동조합 ‘담쟁이’가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민주·민생의 현장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터넷언론을 새달 창간하기로 했다.
이날 총회에서 조헌정 향린교회 담임목사가 이사장에, 김하범 민주주의국민행동 운영위원장, 윤택근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의장 등 12명이 이사에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