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나는 ‘비교’를 모든 종류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나는 부정한다(Denial)>는 1996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이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당시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그를 부인하는 어빙의 주장이 극우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던 상황이었다. 립스타트가 책을 통해 이 같은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인을 비판하자 어빙은 자신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며 립스타트를 고소한다.
나는 ‘비교’를 모든 종류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한다.예를 들어, 중심에 대한 저항이 중심의 부재, 즉 탈중심을 불러왔다는 것이 주변부의 승리처럼 생각되는 것은 이항대립의 구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구상이다. 진정한 탈중심은 중심과 주변부의 대결이 끊임없이 소멸되고 부정되는 과정 그 자체다. ‘비교’는 바로 이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것은 끝없이 타자의 입장에 서려는 일이다. 홀로코스트라는 명백한 진실을 사람들 앞에 다시 한 번 드러내 보이고,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이 더 이상 모욕당하지 않도록 립스타트는 소송을 시작한다. 자신의 연구 성과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직접 증언하길 원한다. 또 홀로코스트의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립스타트 본인도, 홀로코스트 당사자들도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거짓된 신념으로 뭉쳐있는 어빙 앞에 립스타트와 홀로코스트 당사자가 역사적 사실을 들이 밀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 감정과 열정은 배제하고 논리와 이성으로 아주 촘촘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변호인단은 말한다.
결국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립스타트는 법정에서도 기자들 앞에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법정에 앉아 어빙의 거짓된 장광설을 들으면서는 직접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사람들 앞에서 주장하길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한다. 홀로코스트 당사자들의 울분을 전해야 한다는 감정도 삼킨다. 괴로운 ‘자기부정’의 과정을 통해 립스타트는 소송에서 승리하고 진실은 밝혀진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진실이 증명되고, 진실이 승리에 이르는 과정이 조금 재미가 없다. 립스타트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어빙에게 반박하는 시원한 장면도 없고,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며 법정에서 증언하는 벅찬 장면도 없다. 통쾌함이나 감동도 없이, 아주 차갑고 건조한 재판들 끝에 진실은 그렇게 승리를 거머쥔다.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가 지금 특히 의미 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한국에 밝혀야 할 진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부터 위안부 문제와 그에 대한 한일 합의, 국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까지, 진즉에 밝혀졌어야 하는 진실들을 이제 와 몰아서 밝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들이 그저 말과 감정으로만 소비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애도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고, 보듬는 것으로는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승리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소송을 승리로 이끈 것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목소리가 전달돼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립스타트의 열정이 아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애도하고 분노하는 대신, 가스실의 흔적을 철저히 살핀 램튼 변호사의 논리였다.
물론 감정과 열정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판단을 유보하거나 주관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소송이 끝난 후 립스타트가 말하듯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대우 받아선 안 된다.’ 어떤 주장은 거짓이고 어떤 주장은 진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반드시 판단해야만 하는 문제들이다. 부실한 국가적 안전망으로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고, 일제 식민지 치하의 성노예는 존재했다. 그러나 진실이 승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감정으로 소비하는 대신 이성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지난한 ‘자기 부정’이 필요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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