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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통일정부 수립을 꿈꾼 혁명가 여운형..
기획

[역사] 통일정부 수립을 꿈꾼 혁명가 여운형

김현태 기자 입력 2017/07/14 19:56

통일정부 수립을 꿈꾼 혁명가 여운형 
중국, 일본, 러시아를 넘나든 여운형의 활동.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1919년, 여운형은 일본 내각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여운형의 일본행에 대해 임정 내부에서는 걱정과 반대가 많았지만, 도산 안창호의 지지로 여운형은 일본으로 향한다. 이후 일본 국회는 여운형에 관한 논란으로 해산사태까지 맞게 된다.

여운형은 중국의 손문과 친분을 쌓고, 모택동과 장개석의 국공합작에도 관여한다. 또한 러시아의 레닌, 트로츠와도 교유했던 인물이다.

해방 직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1940년대 들어서도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대해 회유코자 했다. 하지만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면서 정보를 얻고 있던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다. 1944년 여운형은 고향과 서울을 오가면서 농민동맹과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이 피살된다. 

1945년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운형은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1위, 최고의 혁명가 1위로 뽑혔다. 해방 전후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이자 정치가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그는 좌·우 양쪽으로부터의 비난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당한 테러만 해도 해방 전에 두 차례, 해방 후에는 무려 열 차례나 된다. 

당시 미군정의 체육부 장관이던 여운형은 이날 열린 IOC가입 기념 한국-영국 친선 축구경기를 참관하려고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길이었다. 혜화동 로터리 인근에서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여운형이 탄 차를 가로막았고, 곧이어 나타난 백의사 단원 한지근이 차로 다가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해방 이후 혼란 속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지던 통일정부 수립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가 없는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었고, 중재자가 없어진 좌우갈등은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이후 한국 문제의 UN 이관 결정이 내려지면서 민족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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