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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추방자들: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죽어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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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추방자들: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죽어서 돌아간 남자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7/07/15 13:25
 ▲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5월21일 아파트 14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상필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필립으로 추방됐다. 7월13일 오후 그의 유골함이 54일 만에 납골당 밖으로 나와 미국행 비행기(양부모 전달)를 탔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첫 사망자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상필의 투신 이틀 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한국인 모원(가명)으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이언(가명)으로 추방됐다. 7월14일 상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다음날 그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정부가 파악한 첫 사례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2009년(1명), 2011년(2명), 2012년(1명), 2014년(1명), 2016년(1명) 한국으로 추방됐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아니다’라며 추방당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6명(정부 파악 인원 전체)이었다. 상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경로를 좇았다. 한 존재가 버려지고, 양도되고, 추방되고, 거부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이 그의 길에서 선연했다. 상필과 모언의 뒤섞이고 엇갈리는 경로를 좇았다. 추방 사실조차 인지되지 못한 ‘무중력 인간’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추방된 두 사람의 길에서 타들어갔다. 한국과 미국이 탁구 치듯 주고받은 6명의 경로를 한데 모았다. 입양과 추방의 ‘이중 환란’이 밀어붙인 동정 없는 세계가 보였다. 유골함 앞에 세워진 액자에서 상필은 살았을 때 볼 수 없던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서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이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상필!” “SORRY, PHILLIP!”
▶ 미국에서 추방된 한 입양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것은 죽음뿐이었으나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은 누구의 의지였는지 그는 죽어가며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를 추방한 나라로 그의 뼛가루를 돌려보내며 입양인들은 ‘해외입양 종결 선언’을 대통령에게 촉구했습니다.

2017년 7월13일 상필 혹은 필립이 밤 10시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김 혹은 클레이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그의 삶 대신 죽음을 태웠다.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는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6년 만에 죽어서 귀국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 그를 배웅했다. 모원 혹은 이언은 상필 혹은 필립이 날아오를 때 구치소에 있었다. 장 혹은 테일러는 김 혹은 클레이가 투신하기 이틀 전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장모원(가명) 혹은 이언 테일러(가명)의 길이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의 길과 겹쳐졌을 때 장은 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뒤를 ‘사건’이 따랐고 사건 뒤엔 길도 나뉘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김상필 혹은 장모원의 길을 걸어오고 걸어갔다.

▲ 지난 5월24일 김상필씨(필립 클레이)의 장례식에서 동료 입양인들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중앙입양원
‘에스코트’로 인계된 상필

1974년 12월 한국인 김상필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보다 3개월 먼저 장모원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도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의 출생 두 달 앞서 최남철(가명·1973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노먼 모스(가명)가 됐다.

1978년 11월 천규호(가명·1970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앨빈 카터(가명)가 됐다.

1979년 3월 신성혁(1975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양부모에게 5년간 학대당한 뒤 파양(1984년)됐다.

1981년 12월 상필은 생후 7년을 꽉 채운 날 버려진 아이로 발견됐다. 태어난 날짜(12월30일)와 발견된 날짜(12월30일)가 우연히 일치했을 수도 있었고, 발견된 날짜에 맞춰 태어난 날짜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었다. 어디서 버려졌고 얼마나 오래 버려졌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은 서울 남대문경찰서를 거쳐 ㅁ수녀회 보육원으로 인계됐다. 모원은 출생 직후 인천의 거리에서 발견됐다. 추정된 날짜가 그의 생일로 기록됐다. 누가 그를 모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진 알 수 없었다.

1982년 3월 상필은 ㅁ수녀회 보육원에서 ㅊ의집(고아원·서울에서 경기 성남으로 이전해 폐원)으로 보내졌다. 인천의 고아원에 맡겨진 모원은 1976년 4월 대한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

1982년 6월 ㅊ의집 의뢰를 받아 홀트아동복지회가 상필의 해외입양 수속을 밟았다. 상필은 추정되는 아이였다. 상필이 버림받는 과정은 기록에서도 흐릿했다. 친부의 폭력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도망한 친모가 상필을 포기했다는 사실만 홀트는 기록(ㅊ의집 관계자 면담)할 수 있었다. 상필의 앞날은 기록된 시간보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규정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기억해줄 사람이 상필에겐 없었다. 모원도 추정되는 아이였다. 그의 출생과 유기는 상필만큼의 윤곽조차 갖지 못했다.

1983년 10월 상필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입양됐다. 만 9살이 차가고 있었다. 만 6살 이상은 ‘연장아’라고 불렸다. 생을 얻은 지 10년도 안 된 아이들이 입양의 세계에선 나이가 너무 많았다. ‘수요’가 적은 연장아 상필에겐 1년4개월 만에 희망자가 나타났다. 상필을 낳은 나라는 버려진 아이를 키워낼 의무를 민간과 국경 밖으로 떠넘기며 책임을 내려놓았다. 상필을 보내며 ‘해외입양 1위의 아동수출국’이란 지위와 입양 수수료를 외화로 얻었다. 한 해 1천명 이상(916명이었던 2011년에야 1천명 이하로 감소)이 국외로 입양되던 시기였다. 한국에 와서 만나보지 않고도 양부모는 아이를 ‘고르고 배달받을 수 있던’ 때였다. 한국인 상필은 ‘에스코트’(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유학생이나 기업체 직원이 아이를 데려가 공항에서 양부모에게 넘겨주는 일종의 자원봉사)로 양부모에게 인계되며 미국인 필립이 됐다. 모원은 상필보다 6년 빨리 이언이 됐다. 1977년(만 2살) 2월17일 미국 위스콘신주로 에스코트됐다. 비행기 안에서 자다 깬 순간이 그의 인생 기억의 첫 장면으로 남았다.

1984년 7월 필립이 미국 부모로부터도 버려졌다. 기억이 형성된 ‘연장아 필립’은 첫 양부모를 만났을 때부터 아팠다. 버려지고 입양되고 이국의 나라로 보내질 때마다 충격과 당혹이 차곡차곡 쌓여 그의 마음을 갉았다. 양부모는 상필을 오래 인내하지 않았다. 입양 9개월 만에 필립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재입양 가정도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그 집엔 6명(친자녀 4명+필리핀 입양아 1명+위탁아 1명)의 아이가 있었다. 부부는 필립을 인내해줬다. 두 번째 양부를 따라 필립의 성은 클레이가 됐다. 이언의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레스토랑 체인을 운영했다. 친자녀 셋을 두고 있었다. 이언도 양부의 성을 따라 테일러가 됐으나 테일러로서 좋은 기억은 없었다고 훗날 말했다. 4자녀 이상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과 세금감면을 위해 자신이 입양됐다고 이언은 생각했다. 버려지고 입양된 기억은 없었지만 버려지고 입양된 자로서의 삶이 모원의 마음을 갉았다. 8살(1982년)이 됐을 때 양부모는 이언에게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치료제를 투약했다. 12살(1986년) 땐 이언을 위스콘신주의 기숙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사격과 군사훈련을 하는 학교가 이언에겐 교도소와도 같았다. 이언이 2년 만에 퇴학당하자 양부모는 다른 주의 군사학교로 멀리 보냈다.

1988년 8월 박진수(가명·1981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마이클 로스(가명)가 됐다. 88올림픽 개막 20일 전이었다. 매년 ‘해외입양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나라는 올림픽 개최 자격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비난했다.

1989년 4월 신성혁이 미국 오리건주로 재입양돼 아담 크랩서가 됐다. 두 번째 양부모로부터도 죽음의 경계까지 가는 학대(양부모 체포)를 당했다.

1993년 3월 INS(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s·이민귀화국) file number: A23 509 133 TC/RCS. 양부모가 필립의 미국적 취득을 시도한 기록이 입양기관의 문서에 남았다. 병원과 소년원을 오가는 동안 필립은 시민권 심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떤 양부모들은 입양 절차를 시민권 취득으로 잘못 알았다. 어떤 양부모들은 절차와 비용 문제를 이유로 책임을 간과했다. 미국인이 됐다고 믿었으나 ‘공식 미국인’이 아니란 사실을 모른 채 살아온 입양인들이 많았다. 여권을 만들거나 투표를 하거나 범죄기록 조회 과정에서 ‘미국인 아님’이 확인된 입양인이 속출했다. 이언의 양부모는 이언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언이 18살(1992년) 때 양부모는 ‘가족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이언은 테일러의 집을 나왔지만 테일러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 경기도 고양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납골당 관계자가 반출하고 있다.

‘내 나라’에서 거듭 쫓겨나는 사람들

2001년 필립은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의 ‘예외인간’이 됐다. 194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 35만여명의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3분의 1인 11만1100여명이 한국에서 갔다. 시민권을 얻지 못한 입양인들은 법적 불이익과 ‘비국민’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됐다. 입양과 동시에 시민권자가 되도록 하는 법이 이해 미국에서 시행됐다. 법은 만 18살(1983년 출생) 미만만 적용 대상으로 했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은 심사를 받고 자력으로 시민권자가 되라며 제외했다. 필립은 만 26살이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주어졌던 ‘미국인 됨’이 원해도 따기 힘든 자격증이 됐다. 상필의 정신질환과 약물중독도 이 무렵부터 악화됐다. 이언도 예외인간이 됐다. 양부모의 집을 떠나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도시를 찾아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5년 동안 노숙인으로 살았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안정된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길에서의 시간은 자신을 잊어야 버틸 수 있었다. 이언은 거리에서 약을 접했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9년 11월 앨빈 카터가 입양 31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천규호가 됐다. 사장의 지시에 따라 트럭 배송을 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마약운반범이 돼 있었다.

2011년 3월 필립이 코카인 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0년 사이 우울증이 심해졌다. 폭행, 절도, 약물복용 등이 잦아졌고 정신병원 입원과 수감 횟수도 늘어났다. 최소 20여차례 체포됐고, 18차례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9차례 수감됐다고 필라델피아 법정은 기록(7월4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보도)했다. 교도소 수감 중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미국 당국에 확인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땅에서 필립은 그날부터 ‘불법체류자’가 됐다. 이언은 2004년부터 아시아인들이 많은 하와이로 건너가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흔들려온 몸과 마음을 고정해줄 못은 하와이에도 없었다. 약물복용으로 다시 체포됐다.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하와이 경찰에 확인됐다. 34년 동안 ‘내 나라’로 알고 살아온 땅에서 이언은 법을 어겨 체류하는 ‘남의 나라 사람’이 돼버렸다.

2011년 7월 한국이 입양 보낸 필립을 미국이 28년 만에 추방했다. 한국이 포기해 필립이 된 그에게 미국은 ‘다시 상필이 되라’고 통보했다. 그의 삶은 버려짐의 연속이었다.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으며,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미국으로부터 버려졌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은 추방에 온기를 두지 않았다. 구금 상태에서 비시민권자로 확인되면 추방과 기약 없는 구금생활 중 선택해야 했다. 미국 이민국 직원들은 상필을 인천공항에 내려둔 채 돌아갔다. 여비도 제공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할 연락처도 주지 않았다. 이언은 필립보다 3개월 먼저 추방(4월4일)됐다. 이언 테일러가 입양 34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장모원이 됐다. 정체성은 누가 골라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필과 모원은 스스로 고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국과 미국이 그들의 정체를 주고받았고, 주고받는 대로 따를 것을 강요당했다. 버려진 입양인들을 미국이 추방하는 절차도 버리는 것이었다. ‘이태원을 찾아가면 한국어를 몰라도 살 수 있고 찜질방에서 자면 방값을 줄일 수 있다’는 정보가 이민국이 모원에게 베푼 호의의 전부였다.

2012년 6월 상필이 강원도 횡성의 ㅅ선교회로 보내졌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공원에서 노숙 상태로 교회 목사에게 발견됐다. 미국 땅에 처음 내렸을 때 이상의 충격과 공포와 분노가 한국으로 쫓겨온 그를 휩쓸었다. 상필로 돌아왔으나 그는 필립이었다. 상필일 때의 언어를 잃었고 상필일 때의 기억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물기 한 방울 얻을 길 없는 사막 한복판일 뿐이었다. ㅅ선교회는 추방 한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왔다. 그들을 돕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부터 소개받은 추방인들이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까진 입국 공항의 경찰 외사계가 선교회로 보내기도 했다. 1990년대말부터 거쳐 간 추방인들 중 4~5명의 입양인이 있었다고 선교회 대표는 전했다. 입양을 민간에 맡겨온 국가는 추방입양인들의 돌봄도 오랜 기간 민간에 넘겼다. 모원은 이민국 직원이 알려준 대로 이태원을 찾아가 찜질방 생활을 했다. 갖고 있던 돈이 떨어졌을 때 모원의 노숙은 다시 시작됐다. 37살의 모원이 출생 직후 버려진 상태 그대로 되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갔으나 되돌리고 싶은 삶은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모원은 2011년 8월 이태원 거리에서 한 해외입양인에게 발견됐다. 그는 찢어진 바지를 입고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 노숙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 여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노숙인 상필과 모원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몸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내리지도 않은 뿌리를 두 번이나 통째로 뽑힌 그들에겐 땅을 더듬을 실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7월13일 저녁 인천공항 지하 식당에서 오명석(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씨가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들고 출국(미국 양부모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입양인들과 마지막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파악되지 않는 ‘무중력 인간’

2012년 7월 상필이 경북 청송의 ㅈ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ㅅ선교회에서도 그는 추방의 고통을 호소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땐 거리를 나체로 헤매기도 했다. 선교회는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협력 관계에 있는 ㅈ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어불통으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상필이 두 차례 병원 탈출을 시도했다. 모원을 발견해 돕던 사람들(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 대표, 김도현 뿌리의집 원장)은 2011년 가을부터 보건복지부와 중앙입양정보원(중앙입양원의 전신)을 찾아다니며 사태 파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모원은 한국 정부가 처음 접한 추방입양인(시민권 취득 여부 조사 계기)이었다. 모원의 존재가 확인된 뒤에도 비영리단체와 개별 의료인들의 도움이 있었을 뿐 행정지원은 준비되지 않았다. 2016년 6월 이태원에서 노숙하던 모원은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노인을 때려 경찰에 체포됐다. 며칠 뒤엔 진료받던 정신과의원에서 소란을 피우다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됐다.

2012년 8월 입양 38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된 최남철이 은행강도로 체포(2017년 2월 가석방)됐다. 살아남으려고 그는 장난감총을 들었다. 그도 상필이 다녀가기 전 ㅅ선교회에 머물렀다.

2012년 9월 상필이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거주를 옮겼다. 중앙입양정보원에서 전환한 중앙입양원(입양특례법에 따라 설립)이 상필의 입양기관이었던 홀트에 요청했다. 홀트는 상필의 추방 사실을 이때 인지했다. 홀트 이사장이 미국 양부모에게 상필의 옷과 진료기록 등을 받아와 건넸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모원이 폭행 건으로 경찰서에 신고됐다. 정부가 추방 사실을 파악했지만 여전히 중력은 모원에게 미치지 않았다. 상필도 모원도 ‘무중력 인간’이었다. 최남철도 천규호(추방 뒤 정부 파악까지 5년)도 잡아당겨줄 끈 하나 없이 한국에 던져졌다. ‘연고 제로’의 대기로 쏘아올려진 그들은 삶을 지탱해줄 공적 자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둥둥 떠다녔다.
 
2012년 12월 거친 행동으로 마찰을 빚은 상필이 ㅁ병원(경기 고양)에 입원했다. 추방은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외교 사안이었다. 미국은 입양인들을 쫓아내면서 그 사실을 한국에 통보하지 않았고(외교부 재외동포과 “현재 추방 통보는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구금 상태의 입양인이 한국에 영사조력을 신청해야 사실 확인 가능”), 통보받지 못한 한국은 입양인의 추방과 입국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 정부가 인지(복지부 입양정책과 “추방 뒤 국내 입양인 사회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알 뿐 정확한 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하고 있는 추방입양인은 6명(에이케이 샐링 해외입양인연대 사무총장 “내가 아는 경우만 최소 10명”)이다. 정부가 미리 알고 있었던 사례는 신성혁(2016년 11월 추방)뿐이었다. 방송(문화방송 <휴먼다큐 사랑>)으로 추방이 예고됐던 그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픽업(중앙입양원)될 수 있었다. 파악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은 거리잠을 자고, 정신병원을 떠돌고, 장난감총을 구했다.

2013년 10월 상필이 중앙입양원 긴급구호시설 ㄹ의집(위탁운영. 현재 폐쇄)에 입소했다. 추방 2년 만에 그는 한국 정부의 긴급구호대상이 됐다. 상필은 목소리가 좋았다. 그는 환청을 들었고 그 좋은 목소리로 환청 속 누군가와 대화했다. 세상의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땐 귓속에 씹던 껌을 끼워 넣었다. 모원은 상필 입소 한 달 전 ㄹ의집에 와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거벗고 노숙하던 모원은 ㅇ시립정신병원에 두 번째 강제입원(8월)된 뒤 퇴원했다. 석 달 차이(기록상)로 태어나 석 달 차이로 추방된 상필과 모원이 한 달 차이로 입소해 ㄹ의집에서 만났다. 방 두 개짜리 집에 네 명이 살았다. 상필과 모원이 같은 방을 썼다. 모원이 상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사진 속에서 모원의 미소와 상필의 무표정이 대비됐다.

2013년 11월 상필과 모원 사이에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마음을 앓는 두 사람을 한방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 잘못이었다. 모원이 두 차례 입원했던 ㅇ시립정신병원에 상필이 강제입원(2014년 2월 퇴원)됐다.

2014년 4월 마이클 로스가 입양 26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박진수가 됐다. 금지약물 소지로 수감 중 ‘시민권 없음’이 확인됐다.

2014년 11월 상필(5월 ㄹ의집 재입소)과 모원 사이에 두 번째 폭행 사건이 있었다. 모원이 자신의 물건을 훔친다고 상필이 오해했다. 상필의 폭행으로 모원의 두개골이 함몰됐다. 모원은 뇌수술을 받았고 상필은 교도소에 수감(2년)됐다.

2015년 7월 모원이 이태원에서 폭행사건으로 구치소에 수감(징역 8개월)됐다. 뇌수술을 받은 뒤 그는 ㄹ의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공포의 기억이 깃든 방에서 사는 게 무섭다고 했다. 고시원에서 자고 이태원 식당에서 일하다 폭행에 연루됐다. 2016년 3월 출소한 그는 법무부 보호복지공단(옛 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에 입소됐다.

2016년 11월 아담 크랩서가 입양 37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신성혁이 됐다. 두고 나온 물건을 찾으러 양부모 집에 들어간 그는 주거침입과 절도죄 등으로 전과자가 됐다. 상필, 모원, 규호, 남철, 진수, 성혁 6명은 모두 1983년 이전 출생자였다. 1950년대부터 2016년까지 한국이 전세계로 보낸 해외입양인은 16만6512명(복지부가 성가정입양원·대한사회복지회·동방사회복지회·홀트의 입양기록을 토대로 파악)이었다. 복지부가 밝힌 ‘미국 시민권 취득 미확인 입양인’은 1만9429명이다. 한국펄벅재단과 수백 개의 고아원이 직접 입양시킨 사람들을 놓친 수치다. 태미 고 로빈슨 한양대 교수(입양과 시민권 문제 연구)는 전체 입양인 수를 20여만명으로 추정했다. 시민권 미확인자들 중 6%의 ‘상필들’(시민권 취득 최종 거부)이 있을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허상’이 만든 비극

2017년 3월 교도소 출소(2016년 12월) 뒤 머물던 보호복지공단(경기북부지부)에서 상필이 ‘위험행동’으로 퇴소 처리됐다. 두 달 전 상필은 새벽에 휘발유를 마시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유를 묻는 중앙입양원 상담팀장에게 그가 말했다. “아마 죽고 싶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의사소통이 힘들고, 많이 외롭다고 했다. 상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최소한 영어권 나라로라도 갈 수 있길 바랐다. 그 바람을 준비하고 실행하기에 상필은 너무 지쳐 있었다. 은평구 정신요양시설에서 입소상담을 받았으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입소를 거부했다. 상필은 교도소 수감으로 끊긴 일반수급(생계급여+의료급여)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보호복지공단에서 퇴소(1월)된 모원은 서대문구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새벽에 고함을 지르는 그를 경찰이 출동해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3번째)시켰다.

2017년 4월 상필은 홀트일산복지타운(고양시) 건너편 원룸에서 지냈다. 한 달 전 정신요양시설 입소를 거부한 그가 택시를 타고 홀트로 찾아왔다. 원룸(홀트가 방값·생계비 지원)에서 살며 근처 지역도서관을 찾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모원은 정신병원을 나와 고시원(서대문구청이 사례관리)에 방을 잡았다.
5월19일 모원이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다툼을 벌이던 고시원 총무가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해 신원을 조회했을 때 모원의 수배 사실(지난해 경찰 출석 요구 불응)이 조회됐다. 모원은 생활의지가 강했다. 보호복지공단에 있을 때도 생선포장을 하며 돈을 벌었다. 모원은 본래부터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어소통이 안 될수록 자극을 받았고 자극을 받을수록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모원의 거듭된 수감은 고시원 생활과 무관치 않았다. “고시원은 안 된다고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고시원은 평생 한국에서 산 사람도 버틸 수 없는 최저 생활공간이다. 이 땅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를 반성하는 차원에서라도 원룸 수준 이하는 안 된다. 풍부한 언어 서비스와 의료지원, 일대일 사례관리가 주거와 함께 제공되는 센터가 시급하다.”(김도현) 모원은 구치소에 수감됐다.

5월20일 상필이 원하던 일반수급을 회복했다.

5월21일 밤 11시45분. 상필은 고양시의 이름 고운 아파트에 있었다. 원룸에서 10여㎞(차량으로 30분 거리) 떨어진 장소였다. 원룸에서 아파트로 가는 길마다 ‘도시의 평소’가 즐비했다. 물오른 가로수가 초록으로 생동했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신호등 앞에서 시계를 봤다. 그에겐 없는 가족들이 도로 양쪽 아파트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상필이 결코 진입할 수 없는 공고한 일상이 도처에 충만했다. 그가 왜 그 아파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14층 복도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상필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원룸에선 휘발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페트병에 담겨 발견됐다. 상필은 추방 뒤 사망(폐파열, 팔다리 및 골반 골절, 흉부손상)한 첫 입양인이었다. 유서는 없었다.

5월24일 상필의 장례가 치러졌다.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성혁도 상필의 관을 들었다. 그는 “(상필의 영정에서) 나의 내일을 본다”고 했다. 한국 입양정책의 개선은 입양인들이 스스로의 눈물을 닦는 과정이었다. 2011년 그들의 노력으로 입양특례법이 개정(법원의 허가해야 입양 인정 등)됐으나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상필은 끝나지 않는 해외입양의 역사와 부재하는 추방통제 시스템(복지부 “인구아동정책관이 3월말 미 상·하원 의원 보좌관 면담 때 1983년 이전 출생자의 시민권 보장 법안 발의 요청”)의 틈에서 죽었다. 미국 내 입양인들이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앞에서 필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항의(5월30일)했다.

6월23일 모원에게 검찰이 징역 8개월(폭행)을 구형했다.

7월11일 입양인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외입양 산업’의 종결을 촉구했다. 입양 활성화 대신 미혼모 등 원가정 보호를 우선하고, 시민권 취득 실패를 해결할 입양 사후 시스템을 시행하며, 추방입양인들을 위한 주거·의료·취업 등 복지 서비스 제공을 요구했다. 88올림픽 때의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평창동계올림픽(2018년 2월9일) 전 종결 선언’을 호소했다. 시몬 은미(뿌리의집 대외협력팀장)는 물었다. “쫓겨 되돌아오는 입양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가. 입양이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할 것이란 믿음은 허상이다.”

7월13일 오후 3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상필의 유골을 입양인 오명석(미국명 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이 반출받았다. 오후 6시. 입양인들이 인천공항에 모여 상필을 보내는 마지막 추모 모임을 열었다. 밤 10시. 오명석이 상필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날아올랐다. 상필의 유골은 7월19일 필라델피아의 양부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사망 직후 유골 인수 의사를 묻는 오명석의 이메일에 양부모는 “고맙다”고 답했다. 상필의 미국 재입국은 죽었으므로 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나라로 뼛가루가 돼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모원도 날고 싶어 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되길 꿈꿨다. 자신을 떠넘겨온 두 나라의 하늘을 자유롭게 걸어다니고(skywalker)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동댕이쳐져온 그의 시간을 ‘포스’가 붙들어주길 소망했는지도.
7월14일 모원의 재판이 속행했다. 선고가 예정돼 있던 7월5일 재판에서 새로운 사건이 병합됐다.

*해외입양인연대(02-325-6585) 후원: 국민은행 375301-04-000710

〈 한겨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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