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 1940-70년대 러시아의 핵심적인 문제들이 완전히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라 평한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갈등을 다룬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을 이룬 이 작품은 시골 농장의 지주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가 학사 학위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아르카디'를 애타게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들 아르카디와 함께하는 생활을 그리며 기대에 부풀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기대는 곧 실망과 좌절고 바뀌고 만다. 아르카디는 친구이자 스승처럼 따르는 '바자로프'와 함께 왔는데,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라 칭하는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아버지 세대(니콜라이와 그의 형 파벨 페트로비치)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하기 시작한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로 국론이 양분되었을 때, 그리고 선거 결과가 나왔을 때 상황을 분석하면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세대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아버지 시대는 '니힐리스트'라 칭하는 아들 세대를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 비난하고, 아들 세대는 자신들을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라 변호한다.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주위에서 존경받는 원칙이라고 해도 그 원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세대 간의 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처럼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특히 첨예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적 작품인 『아버지와 아들』이 발표된 1860년대 초의 러시아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철학과 예술을 삶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아버지 세대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권위를 믿지 않는 아들 세대에게 "어디 그 공허 속에서, 그 진공 속에서 너희들이 어떻게 존재하나 두고 보자"고 벼르고, "자연과학을 비롯한 실용학문을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아들 세대는 이러한 아버지 세대를 "구식 낭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한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이렇게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 제목만 봤을 때는 가족 내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 부자간의 대립이 작품의 내용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어 제목을 직역하면 ‘아버지들’과 ‘아들들’로, 작품은 가족을 넘어서 아버지 세대(구세대)와 아들 세대(신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중 인물 파벨 키르사노프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가 자유주의, 귀족주의, 독일 낭만주의와 관념론(헤겔)의 영향을 받아 원칙, 이상, 절대적 가치, 개인(개성), 문학과 예술을 중시한다면 아들 세대의 대표자, 평민 출신의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 예브게니 바자로프는 철저한 유물론자이자 경험론자로 오감으로 파악될 수 있고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만을 믿고,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문학을 평가하며,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니힐리스트’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바자로프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과제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미래의 창조와 건설을 위해 터전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자로프는 1860년대 러시아의 혁명주의자를 형상화합니다. 그런데 이 지적이고 용감한 청년은 스스로가 생리적이고 화학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규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타격을 입고 낙향하여 티푸스로 사망한 시체를 해부하다가 메스에 손가락을 베여 간단한 소독을 못한 탓에 어이없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열에 들떠 바자로프가 내뱉은 말 - “난 거인이고 할 일이 많은데!” “러시아엔 내가 필요합니다” - 은 독자의 측면에서 매우 모순적으로 이해됩니다. 과연 작품에서 실질적으로 바자로프가 영웅적 행위를 했는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산 작업을 했는가, 독자들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아버지와 아들』 을 읽은 당대 진보적, 급진적 지식인들은 바자로프가 자신들에 대한 희화화라고 격분했습니다. 보수적 진영 역시 작품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며 도대체 투르게네프가 어느 편인지 의아해했습니다. 나이로 보면 구세대에 속하지만 꽤 객관적이고 냉정한 작가인 투르게네프는 그 어느 세대의 편도 들지 않았고, 양쪽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투르게네프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그려내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을까요. 저는 작품의 마지막에 작가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바자로프가 죽고 나서 몇 년이 흘러 그의 늙은 부모가 아들의 무덤에 찾아오는 장면으로 끝나고, 마지막 문장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아르카디)은 어느새 "아버지에게 훈시 같은 것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아버지(니콜라이)는 어느새 늙고 낡은 세대가 되어버린 자신을 깨닫고 쓸쓸해진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과 아들 사이의 간격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 간격이 점점 더 커지리라는 걸 예감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가 겨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며칠씩 최신 서적들을 읽었던 것도 젊은이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곤 했던 것도 헛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열띤 논의에 자기의 말 한마디를 끼워놓고는 즐거워하던 것도 헛된 일이었다".
재밌는 것은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지주 귀족 계급의 흔적을 가진 구세대를 마음껏 경멸하며,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 세대의 대표 '바자로프'를 바라보는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시선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급진적 젊은이의 패기와 그 대단한 우월성이 '생'(生)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와 함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아버지 세대의 젊음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거부하고 부정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자신의 마음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의사인 그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힘 없이 사그라든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에서 '바자로프'를 조롱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아아! 경멸하듯이 어깨를 으쓱하던, 농군들과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줄 안다던 바자로프(파벨 페트로비치와 논쟁했을 때 그가 자랑하던 점이다), 그 자신만만한 바자로프도 농군들이 볼 때는 한낱 광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이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끝없는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아들 세대와의 거리를 느끼며 '구세대'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쓸쓸한 탄식이었고, 가장 재미 있었던 부분은 남녀 사이를 오가는 불안한 사랑의 감정, 그 미묘한 순간의 포착이었고(사랑일,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것은 작가의 손에 의해 결정된 '바자로프'의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였다. 투르게네프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대 간의 갈등이나 반목이 아니라 ‘화해’와 ‘삶’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적폐청산과 함께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통합’과 ‘상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대동굴벽화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글이 적혀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은 오래된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대격변을 겪었던 19세기만큼 그러한 갈등이 두드러진 세대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사회정치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감정과 갈등을 상징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밀착하여 보여준다. '고전'의 냄새가 물씬 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어투와 철학적 대화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잘 읽히는 책이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작가이며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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