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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정폭력 피해자는 왜 가해자를 떠나지 않을까."..
사회

칼럼] "가정폭력 피해자는 왜 가해자를 떠나지 않을까."

송민섭 기자 입력 2015/03/12 18:05
"가정폭력 피해자는 왜 가해자를 떠나지 않을까."

2012년 말 테드(TED) 강연에서 미국의 가정폭력 피해 여성 레슬리 M 스타이너(50)가 청중에게 던진 화두다. 스타이너는 연애와 첫 번째 결혼 시절 겪은 폭력을 소개하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목을 졸랐던 때를 '미친 사랑'이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다. 남자친구가 유년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털어놨을 때는 자신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혼여행 길에서 자동차 창문에 수차례 머리를 찌이고 일주일에 두 번씩 주먹질을 당했다. 남편은 폭력 후엔 늘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라며 정말 미안해했다. 그렇지만 어느 날부턴가 툭 하면 권총을 꺼내들고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스타이너가 다시 묻는다. "전 왜 그 남자를 떠나지 못했을까요?"

 

송민섭 국제부 기자그녀는 헤어지자고 말하는 순간 남편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거의 매일 계속된 남편의 학대와 '이러다 죽겠다'는 자포자기, 무기력함이 극에 달해서야 겨우 경찰서 문을 두드렸다. 이웃 주민과 가족, 지인들에게도 남편의 구타 사실을 알리고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학대는 오로지 침묵 속에서 자란다. 하루빨리 주위에 도움을 청하라."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규 섞인 당부였다.

최근 인터넷에서 스타이너 강연을 접한 뒤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 전 상임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전 대표는 한국에서 가정폭력이 대물림되는 경우는 30%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내가 남편의 언어·신체 폭력을 "자식도 있는데 유난 떤다"는 주변의 눈총 탓에 계속 참다보면 그 강도는 더 세지고 습관화하게 마련이라는 조언이었다.

덜컥했다. 나는 스타이너 전 남편처럼 폭력가정에서 자라지도, 아내에게 손을 댄 적도 없다. 하지만 아찔한 순간은 많았다. 결혼한 지 4년쯤 지나서였다. 아내가 딸을 데리고 점심을 먹고 있는데, 부아가 치밀어 벽을 향해 씻고 있던 접시를 던졌다. '난 어젯밤 말다툼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데 당신은 어떻게 TV를 보며 웃을 수 있어?'라는 배신감 때문이었지 싶다.

돌이켜보면 유치한 응석이었고 치졸한 복수였다. 내 진심을 몰라준다고, 애정어린 말을 무시한다고, 제발 내 심정을 헤아려 달라며 위협을 가했다. 만약 그때 아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야"라고 정색을 하지 않았더라면, 몇 달 뒤 둘이 부부클리닉을 찾아가 "부부는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 관계"라는 조언을 듣지 못했더라면, 이후 서로 '사랑해 선택한 반려자'라는 처음의 감정을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부모와 학부모의 차이를 아세요? 부모는 자식과 함께 가는 사람이고 학부모는 자식보다 앞서 가려는 사람 같아요. 학부모보다는 부모가 되세요." 아이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부모가 되라는 덕담이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단란한 가정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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