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현태 기자]박주민의원이 아스팔트 뜨거운 온도에 경찰들과 마주서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지난 20대 총선, 은평갑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당선된 됐다.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 참사 관련 변호활동을 하며 일명 ‘세월호 변호사’로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대원외고, 서울대 법학과, 사법고시를 패스한 대한민국 변호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인권변호사, ‘세월호 변호사’로 일하다 정치에 입문한 초선 의원. 여의도 거리와 광화문거리에 서 틈틈히 마주하며 길거리 인터뷰를 석달만에 마무리하며,. ‘거지갑 박주민’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서울 은평갑) 의원은 분명 우리 정당사에서 새로운 국회의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박 의원의 관심은 세월호 참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 ‘가정용 전기 누진세제 개편’, ‘1만 원 이하 카드 소액결제 수수료 면제’ 등 서민을 보살피기 위한 다양한 법 개정안을 발의했거나 발의 준비 중이다. <뉴스프리존>은 박주민 의원을 만나 그가 민생을 위하는 국회의원으로 성장하게 된 과정과 초선 의원으로서의 포부, 그리고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백팩을 메고 현장을 누비며 정부서울청사 앞, 백남기 농민이 누워 있던 서울대병원, 국회 본회의장을 가리지 않고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져 거지 꼴로 자는 모습에 시민들은 열광한다. 페이스북 라이브로 법안 발의 내용을 설명하고, 시민들과 실시간 토론을 하는 그는 분명 시민들과 가까워 보인다. 촛불집회에서 쓰레기를 줍는 모습,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쓰러지던 민중 총궐기 당시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으며 인터뷰하는 장면은 최근에도 다시 공유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권력이 저 위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라면,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온 몸으로 폭포수를 맞아내는 모양새다. 후원금 잔고가 바닥을 보인다는 소식이 들리자 단 4일 만에 후원금계좌 한도(연간 1억 5000만원)가 다 차버리기도 했다. 큰 손의 후원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액을 모아준 결과다.
공부벌레, 어려운 이웃을 마주치다
박주민 의원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익인권소송을 맡는 등 사회 개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그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거리가 멀었다. 박 의원은 “서울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게 된 것 역시 별다른 소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재수 시절 수능점수에 맞춰 진학하게 된 것”이라며, “고등학생 때까지 오직 공부만 했고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박주민 의원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든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박 의원이 학부생이었던 90년대 중후반 당시 학생 사회의 구도는 정치노선에 따라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박 의원은 이러한 구분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농촌활동, 파업 등에 동참하며 사회에 대한 시각을 넓혀나갔다.
박주민 의원이 본격적으로 학생 정치 활동을 시작한 것은 법학부 3학년 때였다. 그는 NL과 PD의 노선을 통합해 분단문제와 노동문제를 다루는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소속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졸업이 가까워졌을 쯤에는 해당 조직 서울대 지부 대표인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박주민 의원은 “본래 법학에 뜻이 없었고, 경영학을 전공해 비즈니스맨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된 것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낙후됐던 봉천동 일대와 서초동 일대에 공부방을 차리고 교육봉사를 하던 시절, 고충을 겪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이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목도한 기억이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강조했다.
공익활동, 세월호 참사, 그리고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박주민 의원이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곳은 법무법인 ‘한결’이었다. 공익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시험에 도전해 합격했지만, 생계 역시 포기할 수 없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박 의원은 “공익 소송을 맡는다고 해서 생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별도의 일을 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 공익 활동을 해야 했다”며 “법무법인 한결이 담당하는 일을 끝마친 변호사가 개인적인 공익활동을 하는 데 관대한 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놔두고 쪽잠을 자며 각종 공익 사건을 변론하는 등 로펌 변호업무와 공익활동을 병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아가 박 의원은 사회적 로펌을 지향하는 법무법인 ‘이공’을 직접 설립하고, 보다 자유롭게 더 많은 공익인권 변호활동을 시작했다. 변호사 시절 그가 맡았던 대표적 변호활동으로 ‘쌍용차 해고 무효 소송’, ‘밀양송전탑 반대 활동 법률지원’,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조항 헌법소원 및 형사변론’ 등이 있다.
박주민 의원은 “로펌 일을 병행하는 것 이외에도 공익인권 변호활동 자체가 주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공익인권 변호 자체에 아직 전문가가 없는 영역이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직접 현장에 나가 의뢰인의 상황을 파악하고 직접 자료를 만들어 내야하는 상황도 많았다. 예컨대 박 의원이 양심적 병역거부 항소 공개변론을 준비할 당시 기존에 정리돼있던 자료가 없어 스스로 논문을 찾는 등 정보수집에 일일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그는 “공익 변호활동 자체의 업무가 과중했기에 스스로 워커홀릭이 돼야만 했다. 욕심과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회상했다.
박주민 의원의 공익인권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 법률 대리’일 것이다. 그가 이 활동을 통해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세를 탔고, 이 때문에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박 의원이 사심을 갖고 세월호 참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참사를 접하고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며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답답함과 슬픔을 느끼고 있던 박 의원은 함께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선배 변호사의 권유로 법률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집회 신고를 하고 SNS 홍보를 통해 직접 촛불집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 박 의원은 유가족과 함께 집회현장을 누비는 등 단순한 법률 대리인을 넘어 유가족들의 동지로서 그들과 함께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관련 집회가 있을 때면 직접 차벽 안팎을 버스 아래로 기어서 오가며 유가족들을 돕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은 그가 ‘세월호 변호사’라 불릴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됐다.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 변호사이기 이전에 ‘거리의 변호사’로 불렸을 정도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공익 전문 변호사였다. 그는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변호사로서 법적 해결책을 제시해주면서, 보다 나은 법제도가 있으면 애초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박 의원이 처음부터 정치에 참여할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보단 정치가 똑바로 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의원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 그가 정치계에 입문하도록 했다. 20대 총선 당시 패배할 것으로 예측되던 더불어민주당은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세를 탄 박주민 의원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당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박 의원은 당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올해 1월 25일 더불어민주당에 전격 입당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0대 국회 총선에서 은평갑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 중간 물어 보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인권변호사가 된 계기는 뭔가요.
= “대학교 때 여러 가지 일을 해 보니 공익적인 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가 가장 재미 있었어요. 사회에 가서도 계속 그런 일을 하려고 했지 변호사가 되려는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작은 철거촌에서 도움을 드리다 보니 ‘변호사가 되면 좀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이후로 사법고시를 공부했어요.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익적인 일을 하다 보니 인권변호사를 하게 됐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셨나요.
=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변호사가 된 이후 여러가지 일을 했어요. 예를 들면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에서 고통받는 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애초에 법이 좀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아예 이런 일들이 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일이 벌어지고 나서 소송 같은 걸 도와드리는 건 사후 처방 밖에 안 되니까요. 그냥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정치가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도 제가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박주민 의원은 “처음에는 비례대표 후보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은평구에 지역구 의원으로 공천을 받은 것에 대해 스스로 바란 것도 아니었거니와 부담도 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은평구의 발전을 위한 일과 인권을 향한 그의 열정을 결합해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
-‘거지갑’ 국회의원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요. 많은 청소년들이 굉장히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 “고등학생 사이에서 제 얘기가 나온다는 게 많이 신기하네요. 일단 ‘거지갑’이라는 별명 자체의 의미가 제가 지저분하다 이런 것 때문에 붙여주신 것은 아닌 것 같고, 제가 외모나 체면에 신경 안 쓰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라는 관점에서 붙여주신 것 같아서 되게 기분이 좋죠. 다만 몇몇 분들은 제가 굉장히 지저분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계세요(웃음).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 실물을 보고 많이들 실망하시는 거예요. ‘생각보다 말끔하네?’라고 하시면서요. 하지만 저는 누차 강조하지만 매일 씻고요. 하루에도 양치 몇 번씩 하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지저분 하다는 선입견은 가지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웃음).”
박주민 의원의 세월호 유가족 돕기는 국회의원이 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세월호 특조위가 유가족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해산됐다. 유가족 대표들은 아직 선체 인양도 끝나지 않았고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특조위 해산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세월호 특별법’(제 7조, 위원회의 활동기간)에 따라 특조위 해산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국무회의를 통해 6월 30일 위원회를 강제해산시켰다.
※ 4ㆍ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 : 제7조(위원회의 활동기간) ①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 1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여야 한다. 다만, 이 기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한 차례만 활동기간을 6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
박주민 의원은 이에 대해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는 방식이 굉장히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관련 법을 근거로 세월호 특조위의 위원회 구성일자를 특별법이 시행된 2015년 1월 1일로 봤다. 이에 따르면 활동기간의 법적 종료 시점은 1회 연장을 포함하더라도 2016년 6월 30일이 된다. 하지만 박 의원의 의견에 따르면, 세월호 특별법이 2014년 11월 통과돼 2015년 1월 1일부로 시행됐다 하더라도, 이는 위원회 구성이 완료된 시점과는 별개의 문제다. 박 의원은 “세월호 특조위는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에 상당 기간 구성원도 없었고 예산도 없었기에 실제 출발 시점은 한참 뒤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활동을 위한 예산은 2015년 8월에나 나왔다. 예산이 없었던 7개월간 특조위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보수언론이 집중 공격하는 대상이 됐을 뿐이었다. 세월호 특조위의 실질적인 구성 시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면, 정부의 지난 6월 특조위 해산 조치 역시 위법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박주민 의원은 특조위 해산의 위법성을 알리고자 세월호 특조위 단식 농성에 동참했다. 박 의원은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야3당이 합심하더라도 국회의원 정족수 3/5 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국민적 여론을 조성해 새누리당에 압박을 가하지 않는 한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 호소했다.
민주와 민생을 위한 법안 마련돼야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 외에도 다양한 민생 법안을 마련 중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임차상인 모임인 ‘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맘상모)’과 함께 발표했던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안’(맘상모법)이 있다. 박 의원은 지난 7월 21일 임차인과 갈등이 불거진 건물주 리쌍의 신사동 가로수길 상가 앞에서 맘상모법 발의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박 의원은 “기존 법제도는 월세와 보증금을 합쳐 환산보증금이 일정 금액 이하가 되는 임차인만을 보호한다. 이 제도로는 서울 중심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임차인을 보호할 수 없다”며 “임차인이 어디서 장사하든 동질적으로 보자는 것이 맘상모법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현행법상 서울지역에서는 환산보증금(월세×100+보증금)이 4억 원을 넘을 경우 영세사업으로 인정되지 않아 법적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경우 임차인은 임대차 계약 자동연장의 대상에서 제외되며 법상 보호기간인 5년이 지날 경우 임대인에 의한 일방적 계약해지 후 쫓겨날 수 있다. 2015년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강남대로, 명동 등 상위 5개 상권의 환산보증금은 7억 9,738만원에 달해 상당수의 임차인들이 보호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소상공인을 도와야 한다는 박주민 의원의 소신은 ‘1만 원 이하 카드 결제에 대한 가맹점 수수료 면제’ 법안 발의에도 반영됐다. 박 의원은 “편의점 등에서 담배 하나를 사더라도 카드 결제를 하게 되는 소비 현실에서 소상공인들에게 수수료는 큰 부담이 된다”며 해당 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박주민 의원은 ‘가정용 전기 누진세제 개편’을 주장하면서 그의 민생 행보를 이어나갔다. 박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의정 생활을 함에 있어,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에 많이 반영되고 국민이 국가의 실질적 주인이 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그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현재 한국의 상황이 “중요한 조약을 체결할 때조차 관련된 절차법이 없어 정부가 마음대로 알아서 하는 식”이라며 “최근 발표된 사드 배치 역시 성주 주민들에게 발표 한 시간 반 전에야 조약 체결을 알려주는 등 절차적 문제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의 뜻이 반영될 수 있는 민주적 조약 체결 절차법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정치는 우리들의 삶 그 자체”
-청소년들에게 전하고픈 말씀이 있다면.
=“주제넘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본인이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것들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와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현대인이 워낙 평가에 쉽게 휘둘리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것을 계속 추구하는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고, 그것을 찾은 이후에는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해요.”
끝으로 박주민 의원은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청년들에게 정치가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박 의원은 “학교 제도, 취업, 세금 등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선거철 일순간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청년들에게 사회단체 활동을 제안하는 한편, 굳이 그 단체에 취업하지 않더라도, 지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했다. 지역 사회의 갖가지 문제를 풀어나갈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생겨남은 물론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킬 뜻깊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조언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영입으로 2016년 1월 입당한 뒤 3월에야 서울 은평 갑 전략공천이 확정됐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치 역풍을 맞던 시절이라, 남몰래 그를 돕기 위해 인형탈을 쓰고 선거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최홍재 후보를 제치고 54.9%의 과반을 득표하며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