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다음 주에 업무 복귀한다.
[연합통신넷= 김현태, 이형노, 정익철기자] 리퍼트 대사는 14일 자신의 트위터에 "모든 우정과 지원에 감사드린다.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가 됐다. 다음 주 후반에 업무에 복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맺음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썼다.
글 하단에는 자신의 쾌유를 비는 사람들이 보낸 꽃다발과 화분 등을 배경으로 아내와 아들, 애견 그릭스비와 함께 찍은 사진 2장을 올렸다.
리퍼트 대사는 지난 5일 민화협 초청 행사에서 김기종씨가 휘두른 흉기에 목과 왼팔을 다쳐 수술을 받았다.
지난 10일 퇴원한 그는 13일 피습사건 후 첫 외부일정으로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주한미군 초청 만찬행사에 참석했다.
◈ 개인 일탈 47% vs 종북 테러 40% 팽팽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이 지난 10일부터 12일까지 1005명을 대상으로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어 본 결과 응답자의 47%가 이번 사건을 '개인 일탈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13일 밝혔다.
그러나 '종북세력이 벌인 일'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40%나 됐다.
연령대별로 보면, 20~40대는 '개인 일탈'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고(30대 66%), 60세 이상에서는 '종북세력이 벌인 일'(62%)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s 지지정당별로는 새누리당 지지층의 60%가 사건 배후로 '종북세력'을 지목한 반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은 66%가 '개인 일탈'로 규정했다. 지지정당이 없는 무당층에서도 '개인 일탈'(49%)로 보는 시각이 '종북세력'(32%) 응답보다 더 많았다.
이번 조사는 휴대전화 임의번호걸기(RDD)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실시됐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 리퍼트 대사에 관해 알아야 할 몇 가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발생 열흘 동안 쏟아진 많은 질문들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흘러갔다. 반미인가? 종북인가? 민족주의인가? 반일인가? 독도 수호인가? 좌파인가? 우파인가?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테러인가? 부채춤을 출 일인가? 석고대죄할 일인가? 너나없이 버선발로 달려갈 일인가? 모든 게 과공(지나친 공손)인가? 정치적 견해와 사회·경제적 처지에 따라 답변이 갈린다. 시간이 흘러도 한쪽으로 수렴되기 힘든 질문들이다. 그럼 정작 피해자인 리퍼트 대사는 여기에 뭐라고 답할까? 그의 각종 관련 기록과 인터뷰를 되짚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리했다. 기왕이면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의사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그에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 얼마 전 아이와 손을 잡고 광화문을 거닐다가 미국대사관 앞에서 리퍼트 대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말을 걸까 말까 망설였고, 그도 저와 아이를 번갈아 보며 쭈뼛댔습니다. 그날은 결국 인사를 못했는데, 앞으로 다시 그런 기회가 있을까 싶습니다. 핵도 없고 사드도 없는 작은 나라지만, 그래도 이 한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봅니다. 아무쪼록 쾌유를 빕니다.
"오바마 안방 들락거릴 가장 오래된 최측근 정치인"
아버지 짐 리퍼트(71)는 아들이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음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11~12일(현지시각) 이틀에 걸쳐 두 차례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평범한(ordinary), 보통의(normal), 평균적인(average) 등의 수식어를 많이 썼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소년기를 회고하다가도 "그 나이 때 애들이 다 그렇지"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마치 최근 불의의 피습 뒤 한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아들 마크 리퍼트(42) 주한 미국대사가 '더이상' 특별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첫 통화에서 어릴 적 기억나는 일화를 묻자 아버지는 "글쎄…(한숨),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화재 속에서 사람을 구했다거나 한 일은 없었다"며 "아내와 상의해보겠다. 아내는 분명 아들 얘기의 저수지 같은 사람이니까"라고 했다. 하지만 두번째 통화에서도 그는 "아내와 상의해봤지만 특별히 소개할 만한 게 없더라. 그냥 착하고 평범한 아이였다"고 했다. 과연 이 아들은 얼마나 평범했을까?
리퍼트 대사는 1973년 2월28일 미국 동부 내륙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교외에서 태어났다. 한때 '미국의 파리'로 불렸을 정도로 고색창연한 건물이 유명한 신시내티는 인구 30만 규모의 중소도시이며, 오하이오주에선 세번째로 큰 도시다. 아버지 짐은 "대학 때를 빼면 신시내티를 떠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로, 45년가량 지역 변호사로 활동해왔다. 어머니 수전(69)은 군인 가정 출신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공군 조종사 아버지(리퍼트 대사의 외할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엔 여느 미군 가정처럼 외국을 전전했다고 한다. 리퍼트 대사의 외삼촌(어머니의 오빠)도 조종사가 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장교로 복무한 리퍼트 대사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외가의) 그런 분위기가 내가 이라크에 간 큰 이유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아버지 짐 리퍼트는 말했다
"아들은 어린 시절 착하고 평범
특징 있다면 훌륭한 유머감각"
고교 때 라틴어와 수학 선호하고
고향서 빈곤층 법률지원 했단다
1997년 학부 마친 뒤 국무부 근무
2005년부터 당시 상원의원이던
오바마의 보좌진으로 들어가
한국대사로 온 것도 본인 의지
대통령 측근 중 핵심으로 평가받아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 보좌진으로 시작
리퍼트 대사에겐 3명의 여동생이 있다. 각각 3살, 6살, 9살씩 차이가 나는 동생들은 현재 변호사, 심리학 연구원,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됐다. "어릴 땐 마크가 동생들 때문에 화를 내는 일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오빠였다. 항상 3 대 1 구도였다. 동생들이 놀리면, 마크는 혼자서 방어해야 했다." 아버지 짐은 그러면서도 "평범한 보통 오빠였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리퍼트 대사는 운동을 좋아했다고 한다. "전자기기가 많지 않았던 시기였고, 텔레비전을 좋아하긴 했어도 과하게 많이 본 건 아니었다. 활동적인 편이어서 어린이 야구팀, 어린이 농구팀, 어린이 축구팀에서 활동했다. 좀 자라서는 신시내티 레즈(야구팀) 같은 지역 연고팀들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나는데, 고등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풋볼, 야구, 농구를 했다. 선수는 아니었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운동에 걸맞은 날렵한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고 하자, 아버지 짐은 "(아들의 몸집이) 꽤 큰 편이지만 아주 큰 건 아니다. 자기관리를 잘하고 있어서, 큰 사람치고는 평균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그나마 찾아낸 아들의 특징은 '유머 감각'이었다. 그는 리퍼트 대사에 대해 "정말 훌륭한 유머 감각이 있다. 누구나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 덕분이라는 게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 웃는 걸 좋아한다. 물론 강요할 건 아니지만, 난 웃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웃으면 하루가 좀 가볍기도 하고. 우리 가족들이 억지로 웃는다는 건 아닌데, 우리끼리 잘 논다."
어려서부터 독서에도 취미가 있었던 리퍼트 대사가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과목은 라틴어와 수학이었다는 게 아버지의 기억이다. 고등학교 졸업 뒤 처음엔 시카고대에 진학했지만, 이듬해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대로 옮겨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리퍼트 대사는 고향 신시내티에서 빈곤층 법률지원 활동을 한 적이 있고, 학교 인근 대도시의 시청에서 인턴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 베이징대에서 중국어를 배운 적도 있었고, 당시 스스로 리모카이(李模楷)라는 중국어 이름을 짓기도 했다. 중국 매체 대다수는 그의 이름을 '리포터'(利珀特)로 음차해서 표기하지만, 일부 중화권 매체는 리모카이라고 쓴다.
1997년 학부를 마치고 이듬해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리퍼트 대사는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민주당 소속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연방 상원의원 보좌진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주로 외교·국방 분야 정책 조언을 맡았던 그는 1999년엔 톰 대슐 상원의원, 2000~2005년엔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 그리고 2005년부터는 버락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의 보좌진으로 일했다.
2000년 당시 레이히 의원실에서 함께 일하다 만난 아내 로빈(40)은 신경외과 의사 헨리 슈미덱의 딸이다. 2008년 <보스턴 글로브>에 실린 부음기사를 보면, 슈미덱은 1937년 중국에서 활동중이던 영국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5살에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뒤에는 필라델피아 하네만의대 병원의 최연소 과장이 되는 등 주목받는 의사였다. 사망 당시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신경외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로빈 역시 보건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고, 상원 근무 시절에도 건강보험 분야에 천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민간 부문으로 옮겨 몇몇 회사에서 일했고, 한국에 온 뒤에도 한 건강보험 기업의 임원직을 맡고 있다. 리퍼트 대사는 국내 영어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는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부사장으로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외교관 배우자로서의 역할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바마 팔이 길어 농구에서 늘 진다?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일하면서 그의 가장 오래된 외교정책 자문이자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2007년 6월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의 대선을 한해 앞두고 네이비실(특수전부대) 정보장교로 입대했다. 앞서 2005년 해군 예비역 장교로 자원입대를 한 상황에서 입대 시점을 통보받은 것으로, 예비역 장교는 소정의 현역 복무 뒤 민간인 신분을 유지하다가 희망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재복무하는 제도다. 리퍼트 대사는 선거전을 앞두고 현역 복무로 공백을 초래한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선거전에서 최전선으로'라는 기사를 보면, 오바마 상원의원은 그에게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했고 "몸조심해라. 난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니까"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리퍼트 대사는 이라크전 참전 등 9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첫 복무를 마쳤다.
두 사람은 함께 농구를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5년 러시아 무기사찰 출장 당시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오바마 상원의원이 리퍼트 대사의 운동화를 빌려 신으면서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막역한 일대일 농구를 했던 일화가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다. 둘의 게임은 항상 오바마 대통령이 이기면서 끝났다고 한다. 리퍼트 대사가 "버락의 팔이 더 길어서 이긴 것"이라고 하면, 오바마 대통령은 "변명"이라고 일축하는 식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가 나와 자주 농구를 한 것은 그가 항상 날 이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대선 때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후보 캠프의 외교정책 선임보좌관을 맡았고, 당선 뒤에는 인수위원회 외교정책분과의 부위원장이 됐다. 이듬해 오바마 대통령 취임 뒤에는 대통령 부보좌관과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비서실장을 맡았다.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세계 초강대국의 외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 정보를 누설했다는 의혹을 받던 중 2009년 비서실장직을 관두고 네이비실에 재입대했다. 2년여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2012년 4월 국방부 아태담당 차관보를 맡았고, 2013년 5월부터 한국대사 부임 때까지는 척 헤이글 국방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여러 측근 중 리퍼트 대사가 '핵심'이라는 평가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인 제임스 만은 오바마 정부 곳곳에 포진한 외교·안보 분야 젊은 측근들을 '오바미안'(Obamians)으로 일컬은 <오(O)세대>라는 책에서, 리퍼트 대사를 데니스 맥도너(46) 백악관 비서실장, 벤 로즈(38)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과 더불어 '최근접 동심원' 인사로 분류했다. 이들 3명의 공통점은 수많은 논문과 책을 출간한 학자나 정치·행정 경험이 풍부한 관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혹자는 여기에 수전 라이스(51)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물들이다 보니 '직보'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도 한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역시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것은 리퍼트 대사다. 맥도너 비서실장은 리퍼트 대사가 2007년 입대하면서 자신의 후임자로 데려온 인물이고, 로즈 부보좌관과 라이스 보좌관은 오바마 대선 캠프에 각각 연설기획관과 외교자문으로 합류한 인사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한국대사 임명장 수여식을 포함한 여러 석상에서 리퍼트 대사를 일컬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불렀다. 리퍼트 대사 부임 전 만난 한 정부 관계자는 "오바마 측근으로 4인방, 5인방을 꼽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리퍼트는 그야말로 오바마의 안방을 들락거린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한마디에 회의가 정리되더라
리퍼트 대사가 국방부 재직 당시 한국 쪽과 했던 회의에 참석했던 한 당국자가 전해주는 회의 풍경에서도 그런 분위기는 유추된다. 리퍼트 대사는 미국 쪽 다른 참석자들이 의견을 각자 제시하는 걸 한참 보고 있다가, '이 말에도 일리가 있고, 저 말에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풀어냈다고 한다. 그러자 의견이 종합되고 논의가 정리되는 분위기가 됐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쪽 참가자들은 '누가 가장 센가'에 대해 합의가 이뤄졌던 셈이다. 국방장관 비서실장 시절에도 나이나 경력 면에서 훨씬 위라고 볼 수 있는 차관 등을 제치고 장관 오른쪽 옆자리를 항상 차지해 상대국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또한 대통령과의 가까운 거리를 시사하는 면모로 풀이됐다.
그랬던 '실세 참모'가 한국대사로 올 거란 이야기가 처음 들려온 것은 2013년 말부터였다. 2014년 1월엔 언론 보도도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처형되는 등 동북아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미국이 북한 도발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는 거란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정식 지명도 되지 않았는데 그의 이름이 하마평에 오른 이유는, 본인의 바람이 가장 강력하게 반영된 거란 설도 있다. 정식 지명이 이뤄진 뒤 한 정부 관계자는 "당시 소스는 본인이었던 걸로 파악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다. (리퍼트는) 의회 보좌관을 하면서 한국에 처음 왔는데, 6·25 전쟁 폐허만 생각하다가 놀라기도 하고 호감도 생겼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 본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요국이라 할 수 있는 한·중·일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가 한국이었을 거란 분석도 나왔다. 중국은 최장기간 재임 상원의원 기록의 맥스 보커스 대사, 일본은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장녀인 캐럴라인 케네디 대사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리퍼트 대사는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관여한 '지일파'라는 분석도 있었다.
미국 국무부 내에선 마뜩잖은 분위기도 퍼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 1997년 임명된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이래로 20년 가까이 외교관 출신들이 대사를 맡았던 나라였기 때문에, 정치인 출신 대사(political appointee)가 오게 되면 직업 외교관(career diplomat)이 갈 수 있는 자리가 하나 사라진 셈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도 주요국은 대개 정치인 출신 대사를 임명하는 경우가 많아, 여러 면에서 한국은 직업 외교관들에게 꽤 선호되는 나라였다고 한다.
하지만 5월 초 백악관은 어김없이 리퍼트 대사를 후보로 지명했고, 6월 중순 베트남대사 후보자, 알제리대사 후보자 등과 함께 실시된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 청문회를 받았다. 청문회에서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아내 로빈과 저는 이곳 의회에서 만났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완전한 이행이 제가 임명된다면 하게 될 최우선순위의 일"이라고 말했고, "한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관심을 보이는 데 대해 환영한다. 한국을 티피피에 가입시키려면 (에프티에이 등) 선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국익이란 관점에서 한국을 상대하겠다는 맹세였고,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언론에 정보 누설 의혹 받던 2009년
비서실장 하던 중 네이비실 재입대
2년여 아프간 복무 마치고 돌아와
국방부 아태담당 차관보직 거쳐
국방장관 비서실장 하다 대사 부임
공격을 받고 너무 유명해져 버렸다
그릭스비를 끌고 광화문 일대를
활보하던 그의 모습 다시 보게 될까
병원 입원 뒤 활동 중단된 그의
트위터엔 언제쯤 글이 올라올까
"흐르는 피…그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당시 불분명한 발음 탓에 "한-일 관계의 중재역을 맡겠다"(We would play a mediation role)고 했는지 "맡지 않겠다"(wouldn't)고 했는지가 국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이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했으면 부적절한 말이고,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불필요한 말"이라는 불편한 반응이 나왔다. 초강대국 외교·안보 정책의 주요 입안자였던 리퍼트 대사의 경험이, 대사 부임 이후에도 해당국의 정서와 전통을 무시한 채 미국의 세계 전략에 일방적으로 욱여넣으려 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리퍼트 대사는 10월30일 임신한 부인 로빈, 애견 그릭스비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바셋하운드종인 그릭스비의 탑승 문제로 비행편을 바꾸느라 하루가 늦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마크 리퍼트입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다소 어색한 한국어 인사를 시작으로,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11월2일 글을 쓰기 시작한 트위터 계정(@mwlippert)을 보면, 그 일상은 꽤 발랄했다. 그릭스비를 끌고 시내를 활보하면서 그 사진을 트위터로 공유했다. 야구팬답게 한국시리즈가 열리고 있는 야구장도 방문했다. 부인 로빈과 함께하는 시내 데이트도, 용산기지 내 한국인 사병들과의 식사도 '보고'했다. 정치인, 운동선수, 영화배우 등 한국의 저명인사들과 찍은 사진은 물론, 관광객들과의 기념사진도 공개됐다. 국내에서 일반 시민의 관심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누가 봐도 즐거워 보이는 삶이었다. 그리고 지난 1월20일 아들 제임스의 탄생까지, 그가 공개한 일상에 적어도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살 법한 행동은 없었다.
3월5일은 그런 삶의 연장선에 놓인 어느 하루였다. 리퍼트 대사는 2004년 이래 주한 미국대사가 바뀔 때마다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조찬강연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주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한-미 관계 발전방향'이었다. 리퍼트 대사가 예정시각(아침 7시30분)을 조금 넘겨 행사장에 입장하자 참가자 200여명은 박수로 환영했다. 연단 바로 앞의 헤드테이블에 앉아서 첫아이 출산 덕담을 주고받다가 유머를 담아 "둘째를 낳을 땐 미국대사가 아니겠지만, 한국에서 낳고 싶다"는 등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죽이 나왔고 첫술을 뜨려 할 때, 갑자기 김기종씨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덮쳤다. 김씨는 흉기로 그를 공격했고, 바로 옆에 앉았던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민화협 상임의장) 등이 힘을 합쳐 김씨를 제압했다. 하지만 리퍼트 대사는 이미 오른쪽 뺨에 길이 11㎝, 깊이 최대 3㎝의 자상을 입었고, 왼쪽 팔에 2㎝의 관통상을 입은 뒤였다.
리퍼트 대사는 곧장 대사관 직원과 경찰 등에게 안내를 받아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경황이 없는 듯 표정은 굳어 있었고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는 나중에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돌이켜, "경동맥 쪽을 다쳤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목 쪽에는 상처가 없었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행사장을 나왔다"며 "행사장이 대사관과 가까운 거리라서 차가 바로 앞에 없었다. 누가 순찰차를 불러주기까지 3~4분 정도를 기다렸는데,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서 있던 그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순찰차를 불러준 것은 조숭호 <동아일보> 기자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예전엔 '광화문에서 개 끌고 다니는 동네 아저씨' 정도로만 알려져 "미국대사인지 몰랐어요"라는 인사를 받던 그였는데, 피습당한 얼굴 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무자비한 공격의 피해자로서, 리퍼트 대사는 전에 없었던 관심과 응원, 그리고 사과와 칭송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5박6일 동안 그의 쾌유를 기원한다며, 또는 그에게 사과한다며 난타, 부채춤, 발레, 개고기 전달, 그리고 '석고대죄' 단식농성 등이 줄을 이었다. 유력 정치인들의 방문도 잇따랐다. 리퍼트 대사는 지난 10일 퇴원 기자회견에서 "한국 국민들이 공감해주시고 성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치의 한가운데서 신중한 태도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 한가운데 서게 된 리퍼트 대사는 꽤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당장 여야 인사들의 병문안 때 인사말의 온도차까지도 입길에 오르는 판이다. 그는 여당 병문안 때는 "저 자신은 물론 미국에 대한 공격(attack to the U.S.)"이라 했다가, 야당 병문안 때는 "이번 사건이 양국 관계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며 양국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결의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도록 모두 노력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상대가 원하는 말을 해준 거란 호사가들의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