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사랑방(대표 김창현) 이전에도 이런 단체는 없었고, 동자동 사랑방 이후에도 이런 단체는 없다. 사회단체는 많지만,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가 터를 잡고 주민의 지지를 얻고 활동하는 단체는 없다는 것이다. 서울에는 동자동 외에도 남대문·영등포 등 일대에 쪽방촌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첫 현장방문으로 영등포 쪽방촌을 찾기도 했다. 동자동 사랑방은 2008년 2월 쪽방 하나에 간판을 걸고 주민공동체 사업을 시작했다. 엄병천 전 대표가 나눔의집에서 활동하며 쪽방촌 주민과 인연을 맺은 것이 바탕이 되었다.
60년을 산 92살 할머니와 72살 딸
동자동은 한국전쟁 뒤부터 가난한 이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가 일을 구하기 쉽고, 각지로 이동하기 편리한 점이 배경이 되었다. 2011년 5월 발행된 <쪽방 신문>에는 동자동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쪽방 이야기가 있다. 원래 일본인 소유의 고무공장이었다가 쪽방으로 개조된 그곳에는 모녀가 60년 이상 살고 있었다. 당시 92살 할머니와 72살 딸은 “당시에 여기가 비어 있었으니 무조건 들어와 살았지”라고 돌이켰다. 그들은 “구청에서 여기가 위험하니까 나가라고 편지가 온다”면서도 “아들네 집에 가도 잠이 잘 안 오지만 여기만 오면 잠이 잘 와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형성된 쪽방은 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지금도 후암동 방향으로 비탈길을 올라가며 40~50년 지난 건물들이 촘촘한 쪽방으로 남아 있다.
동자동 사랑방은 수급권자이면서도 권리를 잘 모르는 주민들에게 수급권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걸핏하면 범죄 혐의자를 찾는다고 동네를 뒤집어놓는 공권력의 인권침해에도 맞서왔다. 덕분에 주민들의 인권의식은 예전보다 높아졌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만난 30대 남성은 “원래는 노숙을 했는데, 사회단체의 도움으로 자활근로 일자리도 얻고 노숙도 벗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홈리스행동 등에서 도움을 얻은 그는 “동자동에 살면서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흔히 추락으로 여겨지는 쪽방촌 입주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다행스런 일로 기억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1년 발표한 실태조사에 바탕하면, 쪽방촌 주민 38.7%는 노숙생활을 경험했다.
동자동 사랑방은 주민의 편의를 위한 일도 한다. 마을공동체 부엌 식도락을 열어 부엌이 따로 없는 주민들의 불편을 덜어준다. 식도락에는 500원만 내면 먹을 수 있는 밥이 준비돼 있다. 반찬은 직접 조리해 먹으면 된다. 동자동에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화요일에는 공원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운동모임도 열린다.
매월 5천원 이상 내면 대출 가능한 협동조합
동자동 사랑방이 함께 만든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은 주민의 신뢰 속에 자리를 잡았다. 2010년 3월, 몇몇 주민이 공제협동조합 설립에 뜻을 모았다. 주민들 스스로 출자금을 내서 조합을 만들자고 결의했다. 같은 해 4월15일 25명의 추진위원은 출자금을 걷기 시작했는데, 주민에게 사업의 뜻을 알리고 종잣돈을 모으기 위해 추진위원들이 폐품 수집에 나섰다. 열심히 고물을 줍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민의 지지를 얻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어버이날 잔치를 벌였다. 밥을 할 형편이 못 돼 국수로 대신했지만, 이날 행사는 마을 잔치의 시작이 됐다. 이렇게 모범을 보이자 출자금이 모이기 시작했고 2011년 3월 조합이 출범했다. 조합원은 매월 1만원씩 출자하고 몇 달이 지나면 대출이 가능하다. 은행 대출이 거의 불가능한 주민들에게 대출금은 젖줄 같은 돈이다. 2013년 7월까지 조합원은 360명, 출자금은 6800여만원에 이른다. 상환율은 72%, 조합은 예상을 뛰어넘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