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어찌할꼬
‘여지하(如之何) 여지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할꼬?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라는 뜻입니다.《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바로 ‘여지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을 보면,「子曰 不曰 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어찌할꼬(如之何), 어찌할꼬(如之何)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不曰) 사람(者)은 나(吾)도 이미(已) 어찌할 수가(如之何) 없다.’입니다.
즉, 스스로 방법을 찾으려고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또 성실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옆에서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인가’ 등과 같이 ‘어찌할꼬? 어떻게 할꼬?’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인생을 영위할 자격이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이나 생각을 표현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또한 의견도 먼저 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지도자가 좋아하는 방식이나 생각을 찾아내, 그 방식에 맞춰 보고하고 그 생각과 비슷한 방안만을 만들려 하기 때문이지요. 의견 또한 먼저 지도자가 제시하면 구성원들은 그 순간 모두 ‘예스맨’이 되고 맙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같은 경우를 ‘집단사고(集團思考)’라고 부릅니다. ‘집단사고’는 개개인의 다양한 사고가 토론 과정에서 노출되지 않고, 집단의 대표적 생각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현상입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조직의 응집력이 높을수록 집단사고의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그 예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이 대표적인 집단사고의 사례일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모든 일에 두 번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나라의 대부(大夫)였던 계문자는 생각이 많아 세 번은 곱씹은 뒤 실천에 옮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공자는 “두 번이면 좋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두 번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한 번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한 번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로움과 불리함을 각각 생각하여 판단한 뒤 실행하면 오류를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손자병법》<구변편(九變編)>에서도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이로운 쪽과 해로운 쪽을 한데 놓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 번 생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악마의 대변자’ 제도를 운영하는 조직도 있습니다.
조직 구성원 중 한 명을 ‘악마의 대변자’로 지명해 무조건 반대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결정적 결함을 토론하면서 찾아내기도 하고, 의견 내지 정책의 부정적 측면을 보완해서 완성도를 높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공자께서는 “어찌할꼬?, 어찌할꼬?”라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성인(聖人)이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우유부단해져서 문제이고 반대로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두 번 생각하라고 한 것이 아닐 런지요?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가 됩니다.《서경(書經)》에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바보라도 생각할 줄 알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라고 했습니다. 즉, 타고난 성품이 아름답고 밝은 성인일지라도 살피고 염려하지 않으면 사사로운 뜻이 가로막아 도리어 어둡고 어리석은 광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둡고 어리석은 광인일지라도 능히 살피고 분발하면 그 기질이 변화되고, 명철(明哲)하게 돼 밝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참된 정치를 위한 마음자세도 반드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편적인 사실에 집착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생각을 줄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고, 생각을 멀리한다는 것은 고정된 시각에서의 생각, 즉 집착을 버리고 다양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여지하’는 종교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불교의 가장 큰 화두(話頭)는 ‘이 뭣 꼬?’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의 최대 화두는 ‘어찌할꼬?’이지요. 즉, ‘이 뭣 꼬?’가 진리를 깨치는 데 최종 목표라면, 원불교의 ‘이 일을 어찌할꼬?’는 깨친 그 진리를 일상에 활용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은 수행의 최종 목표가 견성(見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할꼬?’라는 인생의 화두는 인생의 시비이해를 가늠하는 솔성(率性)의 잣대와 먹줄을 얻게 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위정자의 근본 마음도 ‘이 일을 어찌할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달 동안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이 일을 어찌할꼬?“의 모습을 잘 보여 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래에 있었던 여야 대표 회의에서도 의제(議題)를 정해놓지 않고 편안하게 토론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재벌 열다섯 명을 초청하여 의제와 시간을 정하지 않고 무한 토론을 실시한 것은 바로 ‘이 일을 어찌할꼬?’의 구현이 아니겠는지요? 이와 같이 지도자는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나이 많은 스님이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스님 한 분이 노스님에게 다가옵니다. 그의 교만(驕慢)을 꿰뚫으신 노스님이 말씀 하십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스님이 흙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노스님은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노스님은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스님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이 단단한 아만 심(我慢心)과 교만심을 깨야 씨를 심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무릇, 지도자는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깨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단단한 흙을 부셔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피워 낼 수 있지 않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8월 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