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59회
방문
지선은 애춘이 자신을 만나서부터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매우 어색해 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을 그렇게 쉽게 방아쇠 당기듯 끌어들일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여겼다. 그것은 애춘이 이제 제 자리에 돌아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민지선은 난희를 품에 안아주었다.
“다음 달이 난희의 생일이구나. 우리 생일파티 꼭 하자!”
그러자 우울증과 겁에 질린 표정이 좀 풀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난희는 지선의 품안에 깊이 안기었다.
두 사람은 모델하우스에서 나와 다시 거처하는 집안으로 돌아왔다. 지선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에이프런과 수건을 쓰고 식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는 동안 애춘은 이 신비한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까 잠깐 스치며 훑어보았던 내부를 이제는 여유 있게 구경하기 시작했다. 지선의 고전적인 문화취향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방에 차지하고 있는 장롱이나 가구는 보통 가격수준의 제품이었으나 심미안이 뛰어난 그녀의 예술적 감각으로 색깔과 디자인의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 아늑하고 평온했다. 거실 한 쪽의 그림액자 밑에는 자연적인 분위기를 흠뻑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애춘의 집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과 자신의 취향보다 전문 인테리어에 의해 짜 맞춰진 규격화된 공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비록 자신의 집보다 터무니없이 작은 공간이지만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보살핀 흔적이 돋보였다. 시골에서 가을의 갈대꽃과 수숫대, 감 열매와 가지들을 커다란 전신용 거울 옆에 장식용 흔들 화분에 보기 좋게 꾸몄다. 커텐도 아이보리의 은은한 레이스로 꾸며 우아했다. 오른쪽 구석에 갈색과 흑색의 조화를 이루며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옹이 항아리에 자연스럽게 갈꽃을 한 움큼 꽂아놓았다. 그것은 자연적이고 소박하며 운치가 있었다. 애춘은 포근한 이 같은 분위기가 좋았다. 지선은 주방 쪽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며 애춘이 무얼 하고 있는지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애춘은 행복한 표정으로 방긋 웃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좀 시장하시죠?”
“예, 좀 배고프긴 한데 음식점에서 식혀 먹지 그래. 힘들잖아요!”
애춘은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커텐으로 칸막이를 해놓은 구조였다. 애춘이 커텐을 열고 주방에 얼굴을 내밀며 지선 쪽으로 다가갔다. 주방은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단독주택이라 그런지 가스렌지 맞은편에 조그만 창문이 열려 있어 통풍이 시원스럽게 잘 되고 있었다. 자신의 현대식 세트 식 주방과는 달리 재래식 부엌 같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주방가구는 오래된 듯하나 번쩍번쩍 길이 들어 사람의 숨결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지선이 웃으면서 주방기구는 자신이 결혼할 때 해온 것인데 쓰다보니까 애착이 생기고 멀쩡한 것을 버리기 아까워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후라이팬이나 냄비도 모두 오래되었으나 윤이 나고 청결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앞으로 골동품 전문가가 될지도 모르지!”
그녀가 농담처럼 말했으나 수치스러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더욱 그녀다웠다. 멀쩡한 것을 겁도 없이 내버리고,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은 그 다음날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어느 여자의 상식으로는 지선이 고리타분한 짠순이가 될지도 모른다. 가전제품도 멀쩡한데도 또 새로운 것으로 갈아버리는 현대 주부들에게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알뜰살뜰하고 알차게 사는 것이 느껴졌다. 지선이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깍두기를 담은 스텐레스 용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백자기 같이 단아한 종기에 조금 덜어 담았다. 냉장고는 요즘 최신식의 대형이며, 내용물의 이름도 모를 정도로 즐비하게 가득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냉장고에 비하여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선에게 토속적인 냄새가 우러나왔다.
“선생님 추어탕 좋아하세요?”
“추어탕?”
“예. 저는 추어탕을 자주 끓여 먹어요!”
“글쎄 먹어보긴 했는데 주로 사먹지 집에서 해먹나?”
“제가 집에서 직접 끓인 거예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아니, 벌써 다 만들었나?”
“네. 아침에 미꾸라지를 걸러 놓은 것에 야채만 넣어 한 번 푹 끓였어요!”
먹음직한 깍두기와 다대기, 전기밥솥으로 현미잡곡밥이 차려졌다. 지선의 이런 가정적인 분위기가 애춘에게 묘하고 야릇했다. 언제나 지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의 그녀와는 달리 소박한 시골 아낙네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에이프런을 두르고 다소곳이 음식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새로운 아름다움이었다. 애춘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내가 이번에는 또 이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