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기독교인과 같이 행복하고 합리적이고 덕 있고 사랑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 파스칼「팡세」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빌립보서 4장 11-12절
[연합통신넷= 김현태, 이형노, 장동민기자]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갖지 않은 사람이든,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교회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분명히 한국 교회는 소화불량이나 감기에 걸린 정도가 아닌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진단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우리 한국 교회가 특별히 세 가지 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 병
첫 번째 병은 성령론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론이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한 성경적 탐구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이해는 우리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능력 있는 신앙은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도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무슨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병을 낫게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이 조작해서 나오는 힘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성령론으로 인해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성령과 성령충만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령론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고 큰 예배당이 여기저기 지어지고 매주일 헌금이 수백억씩 모이고 있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는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보일지라도 잘못된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많은 고린도교회였지만 그 교를 어리고 육신에 속한 교회라고 말합니다(고전 2:14~3:3). 지금 한국 교회는 성령님이 지배한다기보다는 마술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국 교회의 두 번째 병은 이원론의 문제입니다. 이원론이란 세상일을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으로 갈라놓는 생각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나 목사님이 하는 일은 모두 성스러운 것이고 교회 밖의 일들은 속되고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모든 일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삐둘어지고 오염되었을 뿐이지 모두가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교회와 기독교인은 잘못되고 구부러진 세계를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고 기독교인의 빛과 소금됨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 안에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노동 등의 세상일들은 모두 더럽고 악한 일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앙과 직접 관련이 있는 예배, 헌금, 기도, 봉사 등 교회 생활이 아니면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하는 일 외에도 부부생활, 자녀교육, 직장생활 그리고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고 내용입니다. 기독교인은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깊이 비성경적이고 이교적인 이원론에 빠져 있어서 웬만한 신학적 훈련이 없는 목회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이 이원론에 빠져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지경입니다.
앞에서 본 성령론과 이원론에 관한 문제는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심각한 병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또 하나의 병은 축복관에 관련되어 있는 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으면서 상승작용을 하여 한국 교회의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앞의 두 문제에 대하여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한국 교회의 세 번째 병인 축복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천하 어느 인간도 복을 싫어할 사람이 없겠지만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으로서 특히 복을 좋아합니다. 참으로 억울함을 많이 당한 민족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은 너무도 많이 내부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고 고통을 받은 나라입니다. 못 먹고 못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을 받고자 하는 소망이 너무 절절합니다. 밥을 먹는 수저에도 ‘복’자가 씌어 있고, 대문이나 농짝에도 ‘복’자가 씌어 있습니다. 방바닥에도, 베개에도, 옷고름에도 복이라 씌어 있습니다. 조리에도 복조리가 있고, 주머니에도 복주머니가 있습니다. 도배지에도 복이라 씌어 있습니다. 냉수 떠놓고도 복을 빌고 새해에도 복이고, 그야말로 앉아서 보아도 복이고, 서서 보아도 복이고, 가다가 보아도 복이고 좌우지간 복이 아닌 게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복’이란 말이 사백 오십 번 정도 나옵니다. “복음(福音)”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유앙겔리온”인데 영어로는 “좋은 소식”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말로는 “복음”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잘 이해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복의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복이라고 하는가 입니다. 우리는 통상 복이라 하면 아주 좋은 것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흔히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복을 ‘오복’에 집약시켰습니다. 동양 사회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오복을 살펴보면, 첫째는 수(壽)-오래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큽니다. 다음은 부(富)-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강녕(康寧)-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호덕(攸好德)-덕을 갖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명(命)대로 살다가 보기 좋게 죽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또한 사람이란 자기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시간을 내고 돈을 바치고 정력을 바칩니다. 아무리 바빠도 복이 나온다고 하면 그 일에 시간을 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 바빠서 못했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우선순위가 약해져 버린 것일 뿐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거기서 복이 나오고 좋은 것이 생긴다고 판단되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아끼던 사람도 이걸 먹으면 건강하다고 하면 돈을 빌려서라도 보약을 사먹고, 아무리 평소에 그걸 못 먹겠다고 하던 사람도 건강해진다고 하면 그걸 먹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무엇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 됨됨이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무엇이 복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무엇을 축복이라 생각하느냐에 따라 기독교인일 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말이 기독교적 축복관을 갖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축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과 다른 것을 구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축복을 구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큰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여러 날 동안 산기도를 갔다 와서 자기가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물론 회개하는 가운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회개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질 때 그 사람이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산기도를 일년에 네다섯 번씩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해도 이웃과의 관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진정한 헌금이 아닐뿐더러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을 부지런히 다니고 헌금을 많이 내면, 이것이 회개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물론 회개한 자의 모습에서 이러한 것이 나타나야 하지만 이것이 회개한 자의 모습을 전부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회개는 복의 내용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한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무당종교화 되어가는 기독교
지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성경적이 아닌 것이 버젓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무당종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깃발을 세우고 예수님의 이름만 붙였지 내용은 다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백만 원, 삼백만 원짜리 농짝이 외제 상표를 붙여 일억 원에 팔렸다는 기사가 시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만든 것을 무조건 좋아하니까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삼백만 원짜리 농짝에다 가짜 외제사요를 붙여 일억 원짜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압구정동에 가면 오만 원이나 십만 원짜리 옷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물건이라도 삼십만 원, 오십만 원을 붙여 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린답니다. 심각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도 밖으로는 기독교, 예수, 성령으로 포장해 놓았지만 뜯어보면 그것은 성경적 기독교가 아닙니다.
서울 변두리에 가보면 ‘축복성회’라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벽이나 전봇대에 붙여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신 분, 고민이 많으신 분, 어려운 병이 있으신 분 능력 있는 신앙을 갖기 원하시는 분, 어려운 병이 있으신 분 다 오십시오. 능력의 종, 신유의 종, 축복의 종이 오셨습니다.” 변두리에 가면 쉽게 눈에 뜨이는 벽보입니다. 간판만 다르지 점쟁이집 앞에 있는 선전간판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습니다. 교회의 부흥사라는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심각한 현상입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교회가 뿌리 채 흔들릴 때가 곧 오리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어느 외국 교수님이 한국 교회를 둘러보고 “한국 교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오십년 내에 허물어질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이 기간을 너무 길게 잡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한국 교회가 퇴조 현상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당종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영매기능입니다. 이것은 귀신과 사람의 대화를 매개시켜 줍니다. 무당과 박수가 가운데서 조상귀신과 살아있는 사람을 통화하게 해줍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는가 하고 의아해하실지 모르지만 비일비재한 사실입니다. 둘째, 기륭화복을 예언하는 기능입니다. 무당들이 황홀경에 들어가면 뭐라고 이야기를 중얼중얼합니다. 신 받아서 이야기한다고 하지요. “당신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고 예언합니다. 셋째, 병과 불행을 추방하는 기능입니다. 푸닥거리 하고 살풀이 하고 굿을 통해서 병과 불행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모두 다 무당종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슷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를 보게 됩니다.
14년 현재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무당수가 이십오만 명입니다. 지금쯤은 얼마나 더 많은 늘어났는지 모릅니다만 그 중에 고졸이 45%, 초급대학졸업 이상이 15%니까 3만 명이 넘습니다. 이 중에서 학사, 석사출신이 3천 명이 넘습니다. 지금 웬만한 점쟁이들은 자가용을 타고 다닙니다. 또한 큰 사업가들 뒤에는 사업전망과 투자 상담을 위하여 유명한 점쟁이가 한두 명씩 다 있습니다. 한명으로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두세 명씩 두고 있습니다. 연말연시나 국회의원 선거철 또는 공무원 인사이동이 있으면 점쟁이집이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니다. 유명한 치과의사한테 가려면 진료할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야 갈 수 있듯이 유명한 점쟁이집에 그냥 가면 못 만난다고 합니다. 점쟁이들이 그 정도로 바쁩니다. 말이 이십만 명이지 기독교의 목사, 전도사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무당종교는 한국 불교와 유교를 변질시켰습니다. 불교 사찰에 가보면 어디든지 세 가지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이 그것입니다. 대웅전은 불타에게 소위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삼성각은 삼신 즉 칠성신, 산신, 독성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삼성각입니다. 칠성신, 산신을 모셔 놓고 ‘장사 잘되게 해주십시오. 자식 잘되게 해주십시오.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비는 삼성각이 가장 붐비고 사람이 많이 몰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래 불교에는 삼성각이란 것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불교계에서는 큰 스님이신 청담스님은 불교사찰 안에 삼성각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삼성각의 칠성신과 산신을 불태우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삼성각은 무당종교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은 완전히 불교 고유의 것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로 전향하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시는 스님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한국 불교는 지금 100% 무당종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휴암 스님이 지은 「한국 불교의 새 얼굴」이라는 책은 불교개혁에 관한 것입니다. 마술종교, 무당종교가 불교를 지배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쓴 책인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복에 환장한 한국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나는 오늘의 불교인들의 생리에 저항하고 싶다. 설령 불교가 오늘의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신자가 천삼백만에서 백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여지없이 타락된 물질주의 복 사상을 철폐하는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복에 환장한 불교 신자들아!” 이것은 불교의 무당화를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도 복에 환장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불교, 유교를 완전히 삼킨 무당종교가 지금 우리 기독교마저 삼킬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목사님, 전도사님 가운데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의 숫자가 많아지고, 헌금만 많이 모이면 ‘매’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교인이 안 모이고, 교회가 부흥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고난을 받고 어렵게 살아야 되지만 편하고 쉽게 믿게 해주면 헌금도 많이 내고 사례도 올라가니까 꿩 잡는 게 매란 말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간판만 다를 뿐이지 속 내용은 샤머니즘이 판치고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 점쟁이, 예수 무당입니다.
무당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복의 특징은 첫째, 쾌락주의입니다.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복입니다.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고 오래 살고 잘 먹고 잘살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쾌락주의,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은 무당종교의 아주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무당종교에는 윤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인륜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욕망을 채우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둘째, 요행주의입니다. 요행주의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굴러 들어오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힘 들이고 애쓸 필요 없이 무엇인가 굴러 들어오면 그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셋째, 물질주의입니다. 모든 것이 손에 잡혀야 하고 눈으로 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모든 소원이 금방 가시화되고 물질화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당종교는 쾌락과 요행과 물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요행주의쾌락주의물질주의의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당적 축복관이 교회 안에 들어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면서, 교회 안에 교묘하게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100년 된 한국 기독교가 외적으로는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지만 성경말씀으로 축복관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불교가 변질되듯이 세속화의 물결 속에 머지않아 한국 기독교도 변질돼 버릴 것이 불을 본 듯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