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하는 거짓말 중,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의 하나인 "너무 바빠서"라는 말을 나도 하여야 변명이 될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보다도 이 칼럼과 고백하는 내 생활 즉 신앙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이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책을 더 열심히 보거나 기도를 더 열심히 하거나 성경을 더 읽거나 한 것도 아니다. 아마 밑천이 떨어졌다는 것이 바른말일 듯 하다. 어떻든 여유 있게 기다리며 그대로 칼럼을 존재하게 하여준 여러 후배들께 감사드린다.
지난 몇 달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든 내 신앙 고민의 하나를 정리 안된 체로 고백하고 싶다.
지난 주일예배 때는 비교적 시원하였다. Canada쪽에서 내려오는 Zet Stream이 끌고 온 시원한 고기압 덕이었다. 여러 둔 창문으로는 가까운 NY만의 바다 물과 교회가 있는 공원의 나무들을 지나 온 맑고 시원한 느낌의 미풍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들고 있었다.
그 여러 둔 창문턱에 앉아있든 참새 한 마리가 교회 안으로 날라들었다. 1900년에 머리돌을 놓은 이 비잔틴식 벽돌건물은 양편으로 있는 창문틀 위쪽으로 반원형의 천장이 높게 솟아있다. 자연스럽게 날라든 참새는 그 본성대로 높이 하늘 쪽으로 날라 오르고 천장에 닿은 뒤에는 옆으로만 날라 다녔다. 천장에서 늘어뜨려진 몇 개의 전선은 낡은 전구들을 매어 달고 있고 갈데 없는 참새는 그 줄에 매어 달려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앞서의 행동을 되풀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답답하게도 몇m 아래의 그 많은 창문 쪽으로는 결코 내려 올 생각도하지 않았다. 누군가 밖으로 잡아내어 주지 않는 한, 참새의 생존 가능성은 의심이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에 한국의 유명한 여배우가 몇 사람이 자살을 하였다. 그런데 이 젊고 아름답고 장래가 창창하든 유명한 여배우들은 안타깝게도 모두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가르치고 실천한 예수님을 본받는 기독교인이 왜 자살인가?
이 중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글세? 하고 끝날 수도 있다. 그런데 3 사람이 모두 기독교인이라면 우리 먼저 믿는 지도자들의 잘 못된 인도자로서의 문제들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교회는 세대마다 새로운 광야의 소리로서 세상을 이끌었다.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곧 교회의 목표였고 지도자들의 삶의 목표였다. 한국교회도 그와 같았다.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계명기의 교육과 인간의 평등 사상을 주었다. 그 후의 일제 강점기는 한국의 독립이 기독교의 목표였다. 이 목표를 위하여 자신들의 재산과 기득권들을 그들은 희생할 수가 있었다. 한국의 초대교회들에서는 축복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선각자들은 자신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1950년대 해방 후는 월남한 피난민들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낙담하고 희망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세대였다. 이같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들판에 선 사람들, 깡통 지붕과 합판으로 둘러 처진 사람들에게는 "긍정작인 사고"와 하면 된다는 소망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광야의 소리였다. 그래서 전쟁통에서 부서진 터 위에서 한국교회는 믿음이란 곧 축복을 의미한다고 가르쳤고 결과적으로 그 가르침으로 교회와 한국은 부흥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한국의 교회는 부유하여지면서 그 속에서 안주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축복이란 곧 물질적이고 수량적인 풍성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개인과 그 개인이 살고있는 세상의 구원이 목표인데 교회는 개인의 출세 영달과 물질적인 풍성함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세상의 사람들조차도 그 모순 점을 알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투쟁과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앞서 가고 있는데도 교회는 아직도 자기 자신을 배불리는 일에만 치중하였다.
객관적으로 한국교회를 평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물질주의, 수량주의, 팽창주의를 좋은 말로 경고하고 있다. 지금은 이 부유한 교회를 어떻게 가난하게 만드느냐가 목표가 되어야한다. 부유한 교회와 교회의 부유한 지도자들은 반듯이 부패한다. 그 같든 중세교회들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한다. 교회는 믿음과 심령의 부를 자만하나, 실제로 대부분의 교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 밖에 느낄 수 없는 한국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7)
그런 중에도 한국 교회는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음을 안다. 팽창하고 잘 되어 가는 교회를 떠나서 교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작은 시골교회로 간 분도 있다. 연약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고속도로에서 정차하는 낡은 차를 타고 친구 집에서 얻은 헌 옷들을 챙겨서 가는 그런 분도 보았다. 섬기는 큰 교회 체면을 위하여 다음 자기 차는 캐디락을 원한다고 할 필요가 없는 분들도 많이 있다. 세금을 정확히 내고,가장 가난한 교인들과 같이 고민하는 '심령이 가난한' 지도자들도 많다. 한국 안에서도, 그렇게 평생을 섬기다 은퇴하신 지도자들이 노후 대책이나 집 한칸도 없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을 나는 들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가족들의 아픔을 위해 기도를 한다. 그리고 과대 망상증에 매인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인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참된 주님의 말씀을 듣고싶다. 누군가 눈을 똑 바로 뜬 사람은 없는가? 우리에게 믿음을 전하셨든 많은 분들은 자손 3-4대까지 선교지에서 봉사하며 살아갔다. 그같은 방법으로 우리도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 행진을 하여야만 할까? 이를 위하여 쓰인 그 큰 경비들을 이유 없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보내 줄 수는 없었을까? 생각 해 본다. 자만에 빠진 오늘날의 교회는 중세 때의 카도릭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교회 건물에 가친 참새 같이 위만 보고 날아가지 말자.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바라보는 중에서 살아 나갈 길이 보일 듯 하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고, 옆으로는 자기 자신을 종의 모습으로 낮추시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인간적인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시지는 않았다.
"나는 내게서 통회하는 마음을 앗아가는 위로를 전혀 구하지 않고 나를 교만한 마음으로 이끌어 가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상한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은 아니며, 마음에 즐거운 것이라 해서 모두가 선한 것도 아니며, 소망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2부 10장)
바울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 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 조차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달려 갈 길을 다 간 후, 그의 목회를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때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6-28)
지도자는 주님과 그들의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고난이나 생명은 아끼지 않으나, 자기의 양때들과 그들의 목숨과 안전은 그렇게 중시하였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스람이나 불교의 흉내를 내는 위험에의 노출이나 죽음을 찬양하는 지도자는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규탄 받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해치느니라" (요10:11-12)
연륜이나, 믿은 기간이나, 우리는 모두가 어린 양들을 지도하고 책임을 질 지도자이다. 누구를 원망 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살고 믿어오며 남들에게 그런 것 밖에 보여준 것이 없는 나의 지난 날들을 뼈 아프게 도리켜 보아야 하지 않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