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협회장 신호로 편집국 기자들은 물론 출판국과 방송국 사원 180여명이 편집국 한가운데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기관원 출입을 거부한다, 언론인 불법연행을 거부한다”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경영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동아일보 경영진들은 당시 완전히 박정희 정권에 기울어 있었다. 경영진은 이 선언을 외면하고 박정희 정권에 야합해 부당 인사를 내자 200여명이 동아일보 편집국을 점거하고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1975년 3월 17일 폭력배와 용역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로 밖으로 내쫓았다. 군대에서나 사용되는 탐조등을 비추면서 쇠망치와 몽둥이 등을 든 술 취한 폭력배들이 기자들을 시작으로 아나운서들까지 모두 끌어냈다.
쫓겨난 언론인들은 강제해직에 굴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113명은 바로 “민중의 성원을 배신한 동아일보사는 오늘로 생명이 끝났다”, “자유언론 실천은 영원한 과제”라고 선언하면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그 이후 동아투위 결성 40년이 되는 2015년 3월 16일까지 오늘까지 단 한 명도 동아일보에 복직되지 못했다. 이들은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1987년 6월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와 말지 창간에 이어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 창간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동아일보 탄압과 동아투위 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국가기관에서도 인정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동아일보에 “유신정권의 요구대로 언론자유수호 활동 기자들을 해고한 데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 결정은 하지만 이후 법원에서 번번이 뒤집혔다. 동아일보가 진실화해위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내자 행정법원은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를 탄압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난해 12월 대법원(신영철 대법관)은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유가족 13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에서 14명에 대해서만 원고 자격을 인정하며 1·2심을 파기환송했다. 1·2심이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면서도 시효 소멸을 이유로 패소판결한 것보다 후퇴된 판결이었다.
동아투위 회원들이 16일 오후, 40년 전 쫓겨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 앞에 모여 40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지난 40년 세월에 대한 자부심과, 그럼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 훼손된 언론자유와 동아일보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나왔다. 이들은 “언론이 살아야 나라와 민주주의가 산다”고 목소리 높였다.
“전날 부인에게 ‘나하고 결혼해서 별 탈 없이 밥 굶지 않고 살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뭔 소리냐, 시집 잘 간지 알았더니 2년 만에 실업자 아내가 됐다’고 하더라. 새삼 40년이란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고 길거리로 쫓겨났지만 자유언론의 초심만은 변치 않고 40년을 한결같이 싸웠다고 자부한다. 흔들리지 않고 권력에 빌붙지 않고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국민이 지켜봐주고 후배들이 성원한 결과다. 40년 세월은 결코 후회가 아니라 뿌듯함으로 다가오고 있다.”(정동익 전 동아투위 위원장)
“단식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폭력배들에 의해 축출될 거란 이야기가 있었다…오전 2시부터 불침번을 서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2층에서 베란다로 빠지는 철문을 용접기로 잘라 (폭력배들이)들어왔다. 제가 맨 앞에 있었는데 개 끌려가듯 끌려서 밖에 내던져지는 순간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안경이 다 깨져 손바닥에 유리가 박혔다…그때 제가 자유언론 위한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개인의 안위를 위해 제작에 참여하고 권력 굴종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아마도 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아이들과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삶이 됐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싸움에 동참했고 이후 무수한 고통에 동참했던 것이 저로서는 다행이다.”(동아투위 막내인 정연주 전 KBS 사장)
현재 동아투위 위원 가운데 20명이 정보기관에서의 고문과 생활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조민기·이의직·안종필·홍종민·김인한·홍선주·심재택·안병섭·우승룡·배동순·김성균·김덕렴·강정문·안성열·김두식·김진홍·이병주·이인철 ·성유보 위원이 유명을 달리했고, 지난 3일에는 송재원 위원이 눈을 감았다.
동아투위가 40년 전 시작한 언론자유 수호 운동은 현재진행형의 운동이기도 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 신문발행 허가를 얻어 친일파 김성수가 국민주 신문을 사유화한 신문이다. 그 이후 온갖 아부를 다 해 마침내 전두환 정권에 굴종을 하다가 6월 항쟁으로 쫓아낸 이후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여 일본말로 찌라시라고 불리는 신문으로 전락했다”면서 “저희의 결론은 하나다. 자유언론, 공정방송이 실현되지 않는 한 민주화와 통일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정동익 전 위원장도 “동아일보는 마침내 쓰레기 소리를 듣는, 언론도 아닌 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드시 해직언론인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민들과 해직언론인들에게 사죄하고 언론으로 거듭나는 날까지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동아일보는 쓰레기다”란 구호는 외치기도 했다.
민주화에 자신을 받쳐온 이해동 목사는 “심지가 없으면 촛불을 켤 수 없다. 동아투위는 언론의 심지고 불씨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불씨가 우리나라를 온전한 참된 언론의 불길이 되는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주류언론, 조중동·종편은 쓰레기 수준을 넘어 일종의 범죄가 되고 있다. 언론환경을 올곧게 세우고 공정언론을 실천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서민들의 삶을 지키는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고 말했다. 김동훈 전국언론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도 “동아투위의 한 분 두 분이 저희 곁을 떠나고 있다. 후배들의 손으로 동아일보 해직사태의 진상을 시급히 규명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기자회견문에서 “동아투위는 영원하다.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에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체제’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서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을 되살리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현역 언론인들과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기자회견 이후 열린 40주년 기념식에는 동아투위 위원들과 유족들, 함세웅 신부, 백기완 선생 등이 참석했다. 지난해 고인이 된 성유보 선생의 아들 성동모씨는 이 자리에서 “기억은 안나지만 사진을 보면 내가 2살 때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있었더라”면서 아버지 장례를 도와준 동아투위 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아래는 동아투위 성명.
동아투위는 영원하다 동아일보는 죽고 있다.
내일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결성된 지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75년 3월 17일 깊은 밤, 박정희 정권과 야합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편집국과 방송국에서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단식을 하거나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113명을 폭력배들의 손을 빌려 거리로 쫓아냈습니다. 바로 그 113명은 그날 오후 “민중의 성원을 배신한 동아일보사는 오늘로 생명이 끝났다” “자유언론 실천은 영원한 과제”라고 선언하면서 동아투위를 결성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동아투위 위원들은 ‘자유언론’이라는 깃발을 단 한 순간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강제해직과 투옥, 정보수사기관의 고문과 생존권 박탈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게 이바지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지금까지 동아투위 위원 스무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자리에 누워 천수를 다한 이는 거의 없습니다. 감옥이나 생활전선에서 얻은 난치병, 고문 후유증, 정신적 압박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는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저절로 동아일보사에 복직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그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뒤, 이듬해 ‘서울의 봄’에 잠깐 동아투위의 눈치를 살피던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이른바 ‘신군부’가 5ㆍ17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아예 동아투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바라기처럼 권력을 추종하던 동아일보사는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는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동아투위는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시기에 행정부와 국회가 복직과 명예회복, 그리고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사는 노무현 정부 때 구성된 국가기구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1975년 3월의 대량해직에 관해 2008년 10월에 내린 ‘결정’을 외면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광고탄압을 가했고,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강제해직 하도록 압박했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와 정황을 통해 밝혀낸 뒤 정부와 동아일보사에 대해 명예회복과 배상을 권고했으나 동아일보사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입니다.
후안무치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진실화해위 결정은 ‘허위’라고 주장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가 거듭 ‘각하’ 판결을 받은 끝에 2013년부터 행정소송 1심과 2심에서 ‘승소’한 뒤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합작’해서 113명을 폭력으로 추방한 사실은 지난 40년 동안 역사적 진실로 굳어져 있는데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사법정의와는 거리가 먼 재판부가 내린 승소 판결을 바탕으로 “동아투위는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우리는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동아투위가 아닙니다. 동아일보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그 어떤 매체도 근접할 수 없는 ‘자유언론의 보루’이자 광고와 판매에서도 가장 앞서가던 언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아일보는 어떻습니까? 대표적인 보수신문들 가운데서 ‘3등’이라는 굴욕을 감수하면서, 채널A와 함께 대중이 믿을 수 있는 진실보다는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거짓을 전파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 사장 김재호 씨를 비롯한 경영진에 경고합니다. 당신들은 초대 사주 김성수와 그 추종자들이 1920년 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내준 신문발행권에 힘입어 ‘민족지’를 표방하면서 ‘국민주주’를 모집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김성수 일가는 ‘국민신문’을 교묘한 방식으로 사유화한 뒤 족벌언론으로 둔갑시켜버렸습니다. 김성수에서 아들 김상만, 손자 김병관, 증손자 김재호로 이어지는 세습 족벌체제는 조선일보사와 더불어 한국 언론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경영진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사는 노무현 정부 때의 법적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을 뒤엎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김성수의 친일매국 행각이 여러 쪽에 걸쳐 명기되어 있는데도 그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고 있는 것입니다.
동아투위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에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유신체제’인 박근혜 정권에 맞서서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을 되살리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현역 언론인들과 언제나 함께 가겠습니다.
2015년 3월 16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