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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 칼럼] 정신일도 하사불성..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 칼럼] 정신일도 하사불성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8/25 10:08 수정 2017.08.28 09:06
▲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칼럼니스트

정신일도 하사불성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중국 남송(南宋)시대에 편찬된《주자어류(朱子語類)》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주자어류》는 주자(朱子 : 1130~1200)의 어록(語錄)을 집대성한 책으로서, 저자는 여정덕(黎靖德)이라는 사람입니다.

《주자어류》가 편찬된 시기는 1270년입니다. 그러니까 주자가 죽은 지 70년 후에 편찬된 것이지요.《주자어류》는 주자가 여러 문인들과 나눈 대화나 문답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그의 사상의 완숙기인 41세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사상을 모아놓은 140권 의 책인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기초이론에서부터 학문방법론, 고전해석학, 동시대인 비평, 이단 론, 역사철학, 잡류,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합니다. 또한 우주의 삼라만상에 관한 논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주자어류》제 8권 71번째 조목을 보면, ‘陽氣發處 金石亦透 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이면 쇠와 돌도 또한 뚫어진다.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는 뜻이지요.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특히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이었습니다.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천하에 용명(勇名)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황혼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습니다. 화살은 명중했지요.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 바위였습니다. 그는 놀라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오르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한 가지 일에 온 정력을 다 쏟으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수행(修行)도 마찬 가지입니다. 도를 깨닫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서부터 기술을 연마하고 놀이를 즐기는 일에 이르기까지 남이 볼 때 미친 듯한 그런 무엇이 없이 크게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적(異蹟) 같은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주자가 말한 양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해와 같은 기운이 양기이지요. 그것은 살아 움직이고 점점 커지고 자라나는 기운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점점 자라나는 것은 양기가 커지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손톱으로 누르면 터져 없어질 것 같은 작은 씨앗도 그것이 따뜻한 양기를 받아 움이 트기 시작하면 땅을 누르고 있는 큰 바위를 밀치고 끝내는 밖으로 싹은 내밀게 됩니다. 불면 꺼져버릴 것 같은 촛불도 그것이 힘을 발휘할 때 돌도 녹고 쇠도 녹입니다. 그것이 지난겨울의 촛불집회가 아닌가요?

그러나 그것은 잠시도 쉬지 않은 한결같은 정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정신(精神)이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성과 속된 것이 전혀 없는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인 것입니다.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한 마음 그것이 정신입니다. 정신은 위대한 사랑과 지혜와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그 정신으로 정의를 실천해 가는데 무엇이 이를 방해하고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신이 한 곳에 모인다는 의미는 곧 잠재의식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잠재의식 심연에는 누구나 무한지혜, 무한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심수양(精神修養)을 통해 이 무한지혜 무한능력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이 한 곳에 모이면 마음이 요란하지 않게 되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게 되며, 마음이 그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수양을 하면 어떤 일이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정신수양을 하는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통일이 안 되는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불필요한 마음파동(念波)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요란한 사람은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정신통일이 어려운 것이지요.

머리로는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 하나 정신 내면이 산만해서 집중력을 잃고 하는 일들이 대체로 뜻과 같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마음 따로 현실 따로 가 되어 삶이 답답하고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의식 심연에 무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란하고 산만한 정신을 말끔히 씻어 맑고 밝고 훈훈한 정신으로 되살려 내는 일이 곧 수행입니다. 그 수행의 수단과 방법이 참선(參禪)으로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선(禪)이란 단어를 보면 <示 + 單>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하나를 보는 것이지요.

그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앉아서 하면 좌선(坐禪), 서서하면 입선(立禪), 걸으면서 하면 행선(行禪), 누어서 하면 와선(臥禪), 일하면서 일심이 되면 사상선(事上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인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원불교에서는 <무시선무처선(無時禪無處禪)>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행이라 하는 것은 정신통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요란함이 있는 가없는가, 어리석음이 있는 가없는가, 그름이 있는 가없는 가 그리고 하는 일에 신분의성(信忿疑誠)으로 추진하였는가 못했는가를 살피고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감사생활을 하는 가 못하는가, 자력생활을 하는 가 못하였는가, 성심(誠心)으로 배웠는가 못 배웠는가, 성심으로 가르쳤는가 못 가르쳤는가, 남에게 유일(有益)을 주었는가 못 주었는가를 대조하고 또 대조하며, 챙기고 또 챙겨서 챙기지 아니해도 저절로 되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미묘(微妙)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챙기지 않으면 그 마음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아홉 가지로 챙기고 또 챙기면 우리는 초범입성(超凡入聖)의 큰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위대합니다. 우리 마음의 힘을 키워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경지를 맛보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8월 2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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