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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같은 최순실이 망치고, 박근혜가 장구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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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같은 최순실이 망치고, 박근혜가 장구친 나라

김현태 기자 입력 2017/08/25 10:55 수정 2017.08.25 12:42

[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최순실이라는 한 사람이 초래한 막장 드라마의 결과는 암담하다. 문화계, 대기업, 연예계, 심지어는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그녀의 권력 앞에서는 동등하게 나약한 존재였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3부터 시작해 20대, 30대, 60대까지 촛불을 들고 "박근혜 하야"를 외치고 있다. 2016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사건이다. 더 나은 한국을 위해서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40년동안 지속된 막장 드라마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농담이 된 세계

지난 미 대선이 많은 이들의 예상과 바람을 저버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전 세계의 농담거리였던 이가 이제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트럼프는 여성, 유색인종, 동성애자 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의 의지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수 백인 남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당하게 대통령이 됐다. 당선이 확정되자 미국에서는 KKK 복장을 한 백인 남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트럼프를 반대했던 유명인(주로 여성)들의 SNS로 몰려가 조롱과 욕설을 퍼붓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그간 주장해온 것들이 실현된다면 미국은 세계의 큰형 노릇을 관두고, 이민자를 내쫓으며, 인종과 성과 계급에 대한 차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나라가 될 예정이다. 또 겨우 합법화된 동성 간의 결혼을 다시 불법화하고, 보호무역을 강화하며, 미군이 주둔 중인 국가들에 대해 더 많은 방위비를 부담시킬 것이다.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미국 시민권을 가진 백인들의 권익만을 대표하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분명한 약속이었으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식’을 걷어내고 마음껏 차별과 혐오를 할 ‘권리’를 백인 남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도 선거기간 내내 몸소 실천해왔다.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승리로 끝난 상·하원 의회 선거와, 이러한 공화당 다수 의회와의 협조 속에 순조롭게 임명될 극우-기독교 성향의 연방 대법관이 트럼프의 대격변을 동반 수행할 예정이다. 미국 내 소수자들에게는 공포와 고난의 시간이,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들에게는 예측이 불가능한 국제정세가 예고되고 있다.

다수의 반란?

하지만 단지 백인(남성)들이 멍청하고 오만하고 소수자 혐오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미국이 이 국제적 농담을 실행에 옮긴 것일까? 투표경향에 대한 분석을 보면 백인-남성-저학력자일수록 압도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했고, 민주당의 우세가 예고됐던 미국 오대호 주변의 전통적 공업지역인 ‘러스트 벨트’(위스콘신, 미시간, 인디애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에서도 모두 트럼프가 승리했다.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있다는 위기감과 자신들의 문제를 대변하지 못하는 워싱턴의 정치엘리트에 대한 백인들의 불만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변화’에 대한 막연하고 맹목적인 지지로 나타난 것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하는 것은 한국이 ‘천조국’의 지대한 영향력 하에 놓여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한국사회는 이미 두 번에 걸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모두 기존의 후보검증 시스템을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당하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도덕적 흠결, 정책적 전문성, 후보의 인간적 매력과 정치적 비전 등을 시험대에 올리고 국민에게 평가 받는 것이 오늘날 사용되는 대통령 후보 검증의 툴이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에서 치러진 세 번의 선거는 모두 이 검증시스템을 ‘무력화’시킨 후보가 당선됐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원한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의 선거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은 사회의 ‘다수’라고 부를 법한 이들의 반동(혁명)이다. 하지만 이 ‘다수’들은 승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추락하는 중이고, 고도성장과 가부장제와 권위주의적 권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안정도 진보도 아닌 과거에 한 표를 던졌다. 자고 일어나면 경제가 성장해 있는 나날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더 이상 동성애자와 여성과 유색인종을 인간적으로 대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파 포퓰리즘의 속삭임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다수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게 나라냐”

과연 이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여느 SF가 그러하듯 선진적으로 시간여행을 택했던 한국사회는 지금 그 여행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뒀던 현대의 민주주의 통치 시스템은 비선실세와 선출된 권력자가 벌인 퇴행적 행각 속에서 무력화됐다. 콘크리트라고 불리던 대통령의 지지율은 비록 한 번이지만 5%라는 헌정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일등신문이 청와대에 등을 돌렸고 두 개의 지상파 공영방송만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갈등에 빠져있다. 그 와중에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대체 최순실과 그의 측근들이 손대지 않은 이권은 무엇인지, 박근혜 대통령과 측근들이 그들을 위해 제공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찾기가 어렵다.

지난 시민은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며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화문 일대를 메웠다. 과거 불법행위를 강경진압하겠다고 외치던 경찰의 선무방송은 어느새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에 대한 부탁의 말씀으로 변했다. 몇 명이 모일지 예상도 하기 어려운 12일 집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숙원이었던 “청와대로 가자!”가 법원의 허가 속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정권을 위한 충성경쟁에 앞장서던 이들이 어느새 방향을 바꿔 국민에게 아부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상황이 바뀌면 방향도 언제든지 바뀌겠지만.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보다는,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근본적인 의문을 담고 있다. 문을 열고 나가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했던 참모진과 청와대 시스템의 침묵과 동조가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여당, 보수언론, 재벌, 고위 관료들이 만들어 놓은 권력의 카르텔이 있다. 한 발 더 나가면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권력의 사냥개가 되어 정권에 찍힌 사람들을 쥐 잡듯 잡아댔던 검찰과 경찰이 있다. 한 발 더 나가면 이런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도 모자라서, 주판알 튕기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오는 야당이 있다. 한 발 더 나가면 권력자와 그의 친구들을 살뜰하게 챙기면서, 힘없는 시민들에 대한 갑질과 내부의 이권다툼, 비상식적이고 방만한 운영을 일삼았던 부패한 관료 시스템(물론 기강을 흐린 것은 상층부에 있는 고위직들이다)이 있다. 한 발 더 나가면 그런 국가시스템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규칙을 어기고 노동자와 소비자를 쥐어짜 배를 채운 재벌과 대기업이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면 가지고 있는 권한은 그게 주머니칼이든, 6.9cm짜리 막대기든 마구 휘두르고, 반칙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한 발짝, 아뿔싸 낭떠러지다.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한국사회는 조각이 나다못해 바스라져 가고 있다. 단지 국정이 농락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나라에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고, 노동력을 제공 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수많은 전조가 있었다. 어쩌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했던 그때이거나, 촛불이 광장에서 고립됐던 2008년이거나, 사람이 불에 타 죽었는데 검은 침묵만이 일렁이던 2009년의 용산참사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국가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친 국부 이승만과, 반대자들을 가두고 고문하며 자신만의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심복의 흉탄에 숨진 박정희와,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했던 전두환의 국가이기만 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87년 이후 우리가 이 국가를 다시 수복했노라고 잠시 동안이나마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그래서 87년 이후 계속해서 나타났던 전조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국지적으로 항의하고 싸워가며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2014년 수많은 사람들을 태운 거대한 배가 침몰했을 때, 정부에서 허가받은 가습기 살균제가 독가스가 돼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을 때, 막을 수도 있었을 전염병에 방역체계가 속절없이 뚫렸을 때, 강화유리도 깨트리는 물줄기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농민에게 뿜어댔을 때, 대도심의 번화가에서 단지 그 시간에 그 화장실을 이용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해야 했을 때, 지진이 일어나는데도 안전하다며 그곳에 핵 발전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의 의심은 현실이 됐다. 이 국가는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국가는 나의 죽음마저도 조롱하고 모욕하며 짓밟을 것이다.

무력화된 국가, 얼어붙은 사람들

거의 전 세계적 트렌드가 돼가고 있는 보수의 연이은 승리는, 국가 공동체의 강화가 아니라 그것의 파국적 소멸을 예고하고 있다. 중앙의 의사결정체제는 여와 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 경제성장은 결국 몇몇 거대 부자들의 주머니를 더 두둑하게 해줄 뿐이다. 교육을 위한 노력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빈곤과 빚을 의미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그것을 알아줄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관계로 무의미해진다.

지금 이 순간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거대한 불신과 냉소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이 세상에 선의란 반드시 더 큰 악의를 품고 있다는 신앙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갑옷을 입는다. 그 찬바람 부는 마음 속을 비집고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작디작은 이득에 대한 속삭임이 들려오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잔인해질 준비가 돼있다.

지난 우리의 광장이 너무나도 위태롭게 느껴젔다. 물론 광장을 채우고 있는 분노는 너무나도 정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광장에서 청와대를 향해 진격하는 나의 모습과 분노만을 바라볼 뿐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광장이 우리에게 주는 희열은 귀중한 것이지만, 그 짧은 순간이 지난 뒤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쩌면 더 큰 허망함과 냉소다.

기억하겠지만 우리에겐 경험과 역사가 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향수에 젖거나, 자학적 반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절박한 마음으로 그것이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현재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이 공범관계에 있는지 여부도 '단순뇌물죄'냐 '제3자 뇌물죄'냐를 가를 쟁점으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 만큼은 지금이라도 국민에게 반성과 참회로 국가를 잘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어주었던 기대감을 더 이상 실망을 주어서는 안된고 책임있는 모습을 한 번은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후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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