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63회
방문
“난 학교 다닐 때부터 병이 든 것 같아요. 엄마는 어린 나에게 가방, 구두, 옷을 모두 최고의 명품으로 치장해 학교에 보냈어요.”
애춘은 언제나 무리에게 둘러싸인 공주였다. 부잣집 딸의 광채를 받으려는 듯 친구들은 자신에게 아양을 떨며 찬사를 보냈다
“우리들 중에 애춘이 네가 제일 예뻐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키도 제일 크고 옷도 예쁜 것이 많고 부자야.”
“암, 그렇고말고. 애춘은 정말 좋겠다! 정말 부럽다 얘.”
그런 친구들에게 애춘은 눈깔사탕과 왕사탕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친구들은 그 사탕을 까서 입에 넣고 달콤함에 젖으며 계속 자신을 추켜세우느며 재잘거렸다. 그런데 싸구려 에나멜 구두를 신은 아이는 애춘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애춘에게 아무런 찬사도 보내지 않았다. 언제나 눈길도 주지 않았고 명품차림에 감탄사가 없었다. 그 아이는 애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늘 자신이 해야 하는 학업이나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은 빨강색 에나멜 구두를 가끔씩 내려다보며 기뻐했다. 추석날에 아버지가 선물해 준 구두라면서 밝은 표정으로 기뻐했다.
“감히 나에게 고개를 굽실거리지 않는 너!”
애춘은 자신을 부러워하지 않는 그 에나멜 구두의 볼따구니를 철석 후려갈겼다. 그랬더니 눈에 번쩍하며 그 아이도 애춘의 볼따구니를 후려쳤다. 애춘은 온 힘을 다해 앙앙거리며 그 아이를 선생님이 혼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발악하듯 울었다. 그러나 그 에나멜 구두는 선생님의 꾸중이나 애춘의 부모가 달려와서 혼내줄 것에 대해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울지도 않았다. 옷은 나이롱 쉐타를 입어 허름했지만 눈만은 샛별처럼 빛나고 늘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가난뱅이'라고 놀려댔지만 그 눈은 총명과 의연함으로 오히려 애춘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잘 난 체 하지 마! 네가 뭐 공주나 되는 줄 알아?”
“뭐? 이 거지 같은 게? 이 가난뱅이! 거렁뱅이야.”
애춘은 화가 났다. 악을 쓰면서 발로 그 에나멜 구두를 밟았다. 그래도 에나멜 구두는 여전히 울지 않았다.
“그런데 민 선생을 만났을 때부터 전 그 에나멜 구두가 자꾸 떠오르며 그 애가 성장해서 제 앞에 나타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네. 전 그 에나멜 구두처럼 그렇게 자랐어요. 결코 부러워하거나 비굴하지 않았고 고집이 세고 당당하게….”
언제나 묻는 말에만 대답하던 민지선이〈에나멜 구두〉가 바로 자기가 틀림없다는 듯 모처럼 입술을 열어 자신의 이력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호남지방의 바다를 낀 농촌마을에서 한 여자아이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싸워야했다. 맏딸의 위치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억척스러운 여자아이였다. 그 소녀는 고시공부 하는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어린 여동생을 돌보며 집안일도 거의 도맡아서 해야만 했다. 농번기의 바쁜 철에 부모님들이 거의 들판에 나가서 농사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빠들이 고시공부를 할 때 청소를 하면서 책표지를 읽어보며 한자와 시를 틈틈이 마루에 걸레질을 하며 외웠다.
견마지로다, 견마지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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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이 높아서인지 시를 한 편씩 외워가는 것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한자도 고사 성어를 외우면 왠지 자신이 어른이 된 듯 유식한 지식의 축적으로 풍성함을 맛보았다. 특히 루이14세가 시를 사랑하여 매일 한 편씩 시를 외웠다는 소리를 오빠들의 대화 속에서 훔쳐듣고 김소월의 시를 꺼내어 한 편씩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지용의 시를 매우 좋아했다.〈향수〉의 시는 그야말로 시골의 정감을 리얼하게 표현한 듯하여 외우고 중얼거릴 때 마치 자신이 시인이 된 듯 두뇌 속에 충만한 지적인 동전이 땡그랑거리는 듯했다.
“나만이 즐기는 고급 학문이다. 난 여자지만 반드시 공부를 많이 해서 여성리더가 되어야지”
이런 꿈을 품고 소녀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