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복례의 길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예의(禮義)와 법도(法度)를 따르는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극기복례라는 말은《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의 수제자인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입니다. 여기서 ‘극(克)’이란 이긴다는 것이고, ‘기(己)’는 몸에 있는 사욕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復)’이란 돌이킨다는 것이고, ‘예(禮)’란 천리(天理)의 도덕적 법칙(節文)을 말합니다.
사람의 충동은 예와 의(義)로써 조정해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예의로써 나날이 극복하는 길이 사람됨의 길이 되고, 나아가 이를 사회적으로 확충시키면 곧 도덕사회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학(道學)의 근본 목적은 바로 ‘인’을 구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 ‘인’의 참뜻을 알면 천지만물의 하나 됨을 알게 되고, 하늘과 사람의 교섭에서 하나로 통관하는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극기복례에서는 욕심을 이기는 순간이 복례의 순간입니다. 극기를 해서 내 마음이 하늘마음이 되고, 예를 회복하여 세상이 질서 있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는 것이 어질 인(仁)이겠지요. 그런데 예의가 어떻게 ‘어 짐’에 이어질까요? 상대 의원에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관행은 의회정치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영국 의회는 서로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마주 앉아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유명합니다. 과거에는 의원 간의 폭력 사태와 패싸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호칭할 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인데, 실제로 도입된 이후 영국 의회에서 몸싸움은 확연하게 줄었습니다.
말이라는 게 신기해서, 존경하지 않아도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 하나만 붙이면 스스로의 감정을 절제하고 사실과 논리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 당 의원을 존경해서 ‘존경하는’이라는 말을 써주는 게 아닙니다. 상대에게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겠다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겠다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지요.
그럼 그 극기복례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교만(驕慢)입니다.
교만은 사자처럼 무서운데, 이는 겸손으로써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사은(四恩 : 天地 父母 同胞 法律)’인 진리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잘나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에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교만은 겸손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질투(嫉妬)입니다.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납니다. 이것은 용서로써 가라앉혀야 합니다. 질투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남의 복 받는 것을 싫어하고, 남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질투는 바로 교만의 친구이지요.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질투가 아닐까요?
셋째, 탐욕(貪慾)입니다.
탐욕은 마치 손아귀에 물건을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 것입니다. 이는 보시(布施)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고 인색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끝없이 재물을 바라는 것입니다. 탐욕의 마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얻고도 헐떡거리는 것이 아닐까요? 첫째가는 공덕(功德)이 보시입니다. 웬만큼 얻었으면 탐욕을 버리고 보시의 공덕을 쌓으면 어떨까요?
넷째, 분노(憤怒)입니다.
분노는 타오르는 불길입니다. 이 불은 인내로써 꺼야 합니다. 분노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막말과 욕설, 그리고 살상(殺傷)과 지나친 형벌 등의 여러 일들은 다 이 분노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사람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면 죄고(罪苦)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다섯째, 음란(淫亂)입니다.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합니다. 음란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본능을 즐기면서 스스로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음란을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修行)을 통해 점점 그 불길을 잠재워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들 수록 차차 그 욕망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나태(懶怠)입니다.
게으름은 마치 둔하고 힘이 빠진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부지런함으로써 채찍질해 주어야 고칠 수 있습니다. 게으름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덕행(德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욕망에 거리낌이 없고, 귀찮은 일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善)에 대한 굳은 의지가 없고,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이 모두 나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우치(愚癡)입니다.
어리석음은 탐냄, 성냄과 더불어 근본 번뇌의 원인입니다. 보통 삼독(三毒)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번뇌의 작용이 우리에겐 독약과도 같은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람들은 욕심과 성냄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반면에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그 심각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은 고치면 되지만 어리석음에 물들면 캄캄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극기복례의 길이 만만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일곱 가지로 나를 이겨내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옛말에 ‘가시나무는 쳐내도 다시 길어지는데, 지란(芝蘭)은 길러도 죽기 쉽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은 하기 어렵고 악은 범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악심은 처음 날 때 끊어버리고, 선심은 놓치지 말고 잘 배양하는 것이 극기복례의 길이 아닌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8월 3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