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한창이던 1980년대말 ‘중민이론’ 태동
한국사회 ‘독특한 변혁세력’을 형성한 계층을 호칭세계 석학들과 교류 ‘중국 길림대 객좌교수’ 위촉
‘한반도 탈바꿈’ 미완의 광복 개념에 닻을 내려야
Q. 곧바로 질문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최근 근황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적지 않다. 2010년 서울대 정년 이후 오히려 더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A. 해외 학술활동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8일~12일에는 중국 상해에 위치한 퉁지대학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학은 중국의 국가중점대학 중 하나인데요. 학술회의는 도시의 미래를 사회협치의 관점에서 풀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시진핑 정부는 오늘날 ‘중국몽(夢)’과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설파하고 있죠. 그렇지만 미중 무역 마찰, 홍콩사태 등 예측불허의 돌출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4대 불균형(빈부간, 도농간, 산업간, 지역간) 내부문제도 심각합니다. 이를 해소하는 데, 선결 요건인 ‘경제‧ 사회‧ 행정’부문’ 제도개혁도 무거운 숙제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회조직과 주민들이 공동 참여하는 ‘새로운 위험 협치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중국정부는 이미 2014년에 사회협치를 새로운 정책방향으로 천명했습니다. 저는 이번 국제포럼에서 서울시의 협치모델과 경험을 발표하면서 여러 석학들과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Q. 한상진 이사장님께서는 얼마 전 중국 길림대학교의 객좌교수에 5년 임기로 위촉되셨는데?
A. 저는 2010년 서울대 정년 이후 곧 북경대 초빙교수로 일했습니다. 그 일을 마치자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가 5년간의 객좌교수를 제안했어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2007년 여름방학 때, 그곳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 데, 그 때 2004년에 작고하신 길림대 가오칭하이(高清海) 교수의 학문업적을 발견했습니다.
중국이 배출한 탁월한 천하공생(코스모폴리탄) 이론가입입니다. 그래서 2014년에 그 분의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가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 분의 철학을 서구에 알리는 논문도 출판했지요. 이런 것들이 인연이 되어 저를 객좌교수로 초청한 것 같습니다.
Q. 세계적인 석학들과 교류가 친밀한 관계를 넘어 막역하다고 알고 있다. 올해 7월 말경에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제시한 ‘탈바굼’ 개념에 큰 영감을 받아 ‘탈바굼: 한반도와 제2의 광복’을 출간하셨는데?
A. 저는 울리히 벡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2014년 7월, 서울에서 열렸던 기후변화 국제학술대회 때, 그는 세계의 변화를 보는 새로운 눈으로 탈바꿈 개념을 최초로 제안했어요. 저는 이론적으로 큰 영감을 받았고, 한반도 탈바꿈은 미완의 광복 개념에 닻을 내린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3.1절 기념, 서울대 공개강좌를 열어 광복 개념을 재구성하여 한반도 탈바꿈을 모색했습니다. 이어 2018년 5월 말 광주에서 열린 ‘한반도 탈바꿈’ 국제학술대회에서 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Q. 지난 10월에는 ‘붉은 왕조’ 저자인 프랑스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인 ‘파스칼 다예즈 뷔르종’ (Pascal Dayez Burgeon)과 북 콘서트를 함께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어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태영호 공사와도 3인이 회동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A. 맞아요. 저는 최근 ‘중민출판사’를 열었는데, 첫 출판물은 ‘붉은 왕조’의 한글판이고 2019년 2월 말에 나왔습니다. 사실 이 책은 프랑스 주요 경제잡지 ‘레제코’(LESECHOS)가 ‘2014년 비소설 분야 10대 저서’로 뽑은 것입니다. 북한 정치의 안과 속을 들여다본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불의에 대한 분노가 기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탁월해요. 속을 파악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나라 북한을 이념 대립을 넘어 자유분방한 시선으로 서양과 대비하면서 생동감이 넘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키워드는 ‘자발적 복종’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 다릅니다. 우리는 북한의 현실을 압제, 테러, 탄압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강제된 복종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붉은 왕조’는 이와 다른 북한을 보여줍니다. 저는 2019년 9월 말에 ‘파스칼 다예즈 뷔르종’을 서울에 초청했고 잠실의 ‘책보고’에서 북콘서트를 했습니다. 그 기회에 러시아 출신 한반도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의 좌담을 주선했고 아울러 “북한 인민의 자발적 복종과 북한 정치의 미래”라는 주제로 태영호 공사와 함께 흥미진진한 토론을 했습니다. 이런 비디오 제작물은 곧 공개될 예정입니다.
Q. 이제, 이사장님의 트레이드마크인 ‘중민이론’에 대해 ‘개괄적 세부적’ 논점을 현재형으로까지 확장시켜 달라?
A. ‘중민이론’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중반에 태동했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변혁 세력을 형성한 계층을 중민(中民)이라고 호명했습니다. ‘중민’(the middling grassroots)은 중산층과 민중의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중민은 생활수준은 중산층이지만 의식이나 가치관, 행동양식은 서민적, 민중적 특성을 가진 집단입니다.
중산층에는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부류도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상대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이 높은 부류는 권위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저는 당시 이런 집단을 적절하게 호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민’입니다. 인습과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합리적 사회 개혁에 참여하면서 변화를 촉구하는 그룹들이지요. 중민은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바른 목소리를 내려하고 민중에 대해서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층민중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추구하려고 해요.
또한 중민은 인습이나 권위에 영향 받지 않고 열린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합리적, 이성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민은 자유로운 의사표현, 토론, 강제 없는 합의를 선호합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나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장 법칙 보다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의사소통과 공론(公論)을 추구합니다.
달리 보면, 중민은 하버마스 선생의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집단입니다. 하버마스는 현재 90세의 연세에 계속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 석학의 최고봉에 속합니다. 저는 그분과 최근까지 오랫동안 아주 가깝게 친교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민집단과 중민현상에 대해 일찍 눈을 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그렇지만 공유경제 등으로 일컬어지는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4.0’의 출현으로 현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하게 대두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개념 틀로 중민이론을 일신할 필요가 있다는데 적극 동의합니다.
Q. 18대 대선 때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국정자문단 멤버이자, 2016년 신당의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직을 수락한데는 ‘중민’의 이론가가 아닌 실천가로 의욕과 포부가 앞섰던 것은 혹 아닌가?
A. 안철수 의원이 내건 낡은 이념 청산과 새정치는 중민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저는 제3의 길을 주창했던 안토니 기든스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국 영국 상원의원이 되어 정치인이 되었지만, 저는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2012년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의 대선평가위원장이 되어 당 내부 사정을 깊숙이 알게 되었는데, 그 정당의 체질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려면 안철수 신당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정권 교체의 초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총선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안철수 신당은 그 뒤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저는 현재 안철수 의원의 미래를 예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산은 모두 잃었지만, 우리 정치현실이 너무 엉망이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독일, 미국 등에서 재충전의 길을 걷고 있는 그가 장차 구원투수로 재기할 가능성이 전적으로 소멸되었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해야 할 때, 머뭇거리면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Q. 한국의 국내외 ‘정치‧경제‧국제 기상도’는 매우 흐림이다. 여야의 극한대립, 한일관계의 악화, 양극화의 심화, 북핵문제의 난제 등을 해결하는 탈바꿈의 뉴패러다임을 제언하여 달라.
A. ‘탈바꿈’이라는 단어는 변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타’와 형태를 뜻하는 그리스어 ‘모프’에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나비의 삶이 그 좋은 예입니다. 나비는 신체 변형의 몇 단계를 따릅니다. 알, 애벌레, 고치, 나비 등은 같은 종에 속하지만 각각의 물체적 형상은 상이합니다. 이처럼 탈바꿈은 형식을 파괴하는 변환을 의미합니다. 탈바꿈은 역동적이지만 완벽한 단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기본은 유지됩니다. 당연히 낡은 것들을 다 제거하면서도 지켜야 할 본체, 즉 기본이 무엇인가의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냉전체제 하에서 분단국가로 살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북아의 현실이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탈바꿈 과정에 있어요. 미국, 일본, 중국이 그렇고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한도 이미 탈바꿈 과정에 들어갔어요. 당연히 혼란이 극심합니다.
그런데 이 혼란을 근원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의 체질이 된 고정관념으로 봅니다. 이것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진보-보수라는 것도 낡은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미국을 따를 것이냐, 중국을 따를 것이냐의 유치한 이분법이 강제되는 나라에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고 봅니다.
Q. 행위의 의도치 않은 결과가 탈바꿈을 이끈다고 주장하시던데?
A. 인간의지는 항상 중요합니다. 비록 과정에서 파산했지만 6.15 남북정상회담을 연 김대중의 리더십과 교류협력은 한반도 탈바꿈의 좋은 보기입니다. 참으로 역설인 것은 북한의 핵 개발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게 되자, 한반도 탈바꿈의 지평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 핵개발을 막으려는 국제적 노력이 실패한 결과,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 나쁜 결과가 미국으로 하여금 협상을 통한 비핵화의 길을 걷도록 강제하는 탈바꿈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세계종말을 각오하는 미치광이 패권정치가 아니라면, 무력에 의한 문제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미협상은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결국 한반도 탈바꿈의 문지방을 연 것으로 나는 해석합니다.
Q. 탈바꿈 책의 부제가 한반도와 제2의 광복인데, 여기에 ‘광복의 본질적 정체성’에 생동감을 부여하여 달라.
A. 문자 그대로 풀자면 광복이란 무엇인가를 빛나게 되찾는다는 뜻입니다. 또는 빛을 되찾는 것을 뜻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빛은 무엇보다 상실된 주권회복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의 필수조건일 뿐입니다. 3.1독립선언은 주권회복과 함께 광복의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심지어 일본에 대해서도 단순한 가해자에 대한 징벌을 넘은 회복적 정의를 제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지켜야 할 기본, 본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광복입니다. 제2의 광복입니다. 이 가치는 3.1독립운동에서 발원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거처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각인된 국가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남한과 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규범적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아직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우리는 광복절을 기념하고 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칭송하는데서 끝날 뿐, 광복의 깊은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도 신해혁명 당시 광복운동이 있었고 광복회가 활동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광복의 꿈을 잇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 냉전체제 하에서 살았습니다. 독립운동 이상의 높은 광복의 뜻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미완의 광복의 뜻을 깊게 새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Q.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런 광복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나?
A.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책에서 김구의 ‘문화국가’ 개념에 주목했습니다. 김구는 정말 혜안을 가진 실천가였습니다. 그는 분단국가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문화국가를 주창했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의 차원에서 손발이 묶여있다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 안에서 평화공존의 정신으로 삶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문화국가’의 큰 그릇으로 담아낼 수 있고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 김구의 주장입니다. 분단의 장벽을 뚫고 달리는 탈바꿈의 열차가 도달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목표는 남북한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발전시키면서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문화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는 것입니다.
Q. 저명한 국내외 학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와 포럼을 열고 영향력을 미치려면 ‘중민 재단’이 보다 활성화되어야 하고 이런 기대를 갖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A. 과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흔히 재단 같은걸 하려면 후원자를 먼저 찾고 시작하는데, 저는 그렇게 해오지 않았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재단이 자기의 정체성을 잘 살려서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실적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독일에는 훌륭한 싱크탱크(think tank)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민간 싱크탱크는 대부분 재원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규모가 소규모입니다. 대안 정책들을 개발하여 건의하는 역할을 하지만, 영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2021년 말이 되면 제가 설립했던 공익재단법인 ‘중민재단’도 10주년을 맞습니다. 그 때 어떤 전환점을 만들 수 있을지, 여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한상진 이사장은 누구
이론 연구에 탁월할 뿐 아니라 풍부한 경험적 자료를 제시하는 실사구시형 대학자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 교수는 1945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미국 남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빌레펠트대 연구교수 등을 거쳐 81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2010년까지 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외규장각 도서 반환 한국 측 협상대표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중 한 명으로, 1980년부터 사회변동 주체에 관하여 열띤 논쟁을 주도했으며 ‘중민이론’을 발전시켰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중민연구소 소장이자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