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예선 열리던날 ‘주의 날’ 단호하게 포기
에릭에게 맹비난 일요일 대신 ‘다른 종목 출전’
● 스코틀랜드 선교사 ‘둘째 아들로’
올림픽 금메달의 육상영웅 에릭 ‘헨리 리델’(Eric Henry Liddell)은 영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거리 육상선수였을 뿐 아니라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에릭 헨리 리델(1902-1945)은 1902년 1월 16일 중국 샤오창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아버지 제임스 던롭 리델(James Dunlop Liddell) 목사와 어머니 메리 레든(Mary Reddin)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에릭 헨리 리델의 부모님은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 속한 스코틀랜드 선교사였다. 6세 때 에릭은 형과 누나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에릭은 1907년에 형 로버트와 함께 선교 사역을 해야 하는 부모님과 떨어져 런던 근교 블랙히스의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아들들을 위한 학교’에 정식 입학하였다. 1912년 모팅험으로 이전한 이 학교는 교명을 엘탐 컬러지(Eltham College)로 바꾼다.
선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기숙학교인 엘탐 컬리지는 학력과 체력을 동시에 단련시키는 교육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에릭은 발군의 운동실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특히 육상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신앙과 성품도 부쩍 성장하였다.
이처럼, 에릭 헨리 리델은 엘탐(Eltham) 컬러지에서 뛰어난 운동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빠른 자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육상 실력이 탁월했던 에릭 헨리 리델은 1920년 에든버러 대학(Edinburgh University)에 순수과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육상 선수로 활약하면서 영국에서 개최된 각종 육상 대회에 참가하여 수많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21년에는 스코틀랜드 4개 대학 친선 육상대회 110야드와 220야드 경기에서 우승했고,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럭비팀 레프트윙으로 선발되어 활약을 펼쳤다. 에릭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한편, 에든버러 대학은 우리나라 제4대 대통령 윤보선, 초대 외무부 장관 장택상 등이 유학했던 곳이며, 전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도 이 대학 출신이다.
● ‘투철한 신앙심’ 육상선수로 두각
에릭은 그가 15세가 되는 때,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육상 경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조차도 주님은 그에게 항상 첫 번째 우선 순위였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사람들은 마음이 삭막해져 있었고 좌절과 실의에 차 있었다.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모두 술집이나 도박장에 가 있으니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신앙이 좋고 인기가 있는 에릭을 초청하기로 했다. 에릭의 진솔한 말에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회심한 사람들이 많았다. 여러 곳에서 에릭을 초청했다. 에릭은 스코틀랜드에서 매우 분주한 사람이었다.
에릭 리들이 강사로 온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는 어렸을 때 중병을 앓아 6개월 동안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모두들 앉은뱅이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저는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다리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서 육상선수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고 쉼을 얻으세요.” 라고 힘차게 간증했다.
그런데 코치는 당분간 전도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신문 기사를 내 놓았다. 곧 영국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데 언론은 에릭이 훈련보다는 전도와 간증 활동에 너무 열성적이라는 비난조의 보도였다. “전도 활동에만 전념하는 에릭 리들, 영국 육상 선수권 대회에 에릭을 내보내는 것은 기차비 5파운드만 낭비하는 게 될지도”
에릭은 언론의 이런 비평을 무색하게 하면서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다. 1923년 7월 런던 경기장에서 열린 영국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100m 9초7 영국 신기록, 200m 21초 6로 우승했다. 그 해 가을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3국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에릭은 400m 선수로 출전했다. 에릭은 넘어지고도 우승을 하게 되었다.
에릭 리델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얼마나 존중하고, 소중히 생각했는지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불렀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일도 사랑하게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주일에 오락이나 스포츠도 삼갔으며, 성실하게 교회예배에 참석했다.
● 주일에 열리는 올림픽 예선 ‘단호히 포기’
영국 국민들은 새로운 육상 영웅의 출현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에릭이 응당 1924년에 열리는 제8회 하계 파리 올림픽의 100m 달리기 금메달을 가져 오리라고 확신했다. 온 국민의 기대를 받게 된 에릭도 그에 대비해서 집중 훈련을 시작했다.
에릭 리들은 영국대표로서 1924년 제 8회 파리 올림픽 경기의 금메달 후보였다. 1924년 1월에 올림픽 경기 일정이 발표되자, 에릭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에릭은 100m 예선은 7월 6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경기가 열리는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선은 7월 14일 월요일에 경기를 해야 하는데, 그날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라고 주최 측에서 경기들을 하루 앞당긴 7월 13일 주일로 잡힌 것이다. 이에 에릭은 결단의 순간에 직면한다. 주일에 올림픽 예선 경기에 참여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선포한다. 결선 역시 치르게 될 수 없음은 너무 자명했다.
에릭 헨델은 주일에 경기에 참여할 수 없음을 선언하자, 이전까지 에릭의 인품에 칭찬하고 그의 선전에 환호하던 언론과 국민들은 그의 결정에 맹렬히 비난했다. 그가 출전할 수 없다는 소식은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우승 후보인 그가 경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금메달을 놓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국도 크게 당혹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당신은 당신 나라를 욕되게 할 참이요. 당신은 매국노나 다름없소.” 영국 팀의 총감독은 “말도 안 돼. 절대 이렇게 할 수 없어”라고 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그의 올림픽대표선수 출전권한을 박탈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급기야 웨일즈 왕자까지 친서를 보내어서 100m 경주에 참여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에릭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일에는 달릴 수 없습니다.” 에릭의 친구들 가운데 몇 명은 그를 변호하고자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유명했던 에릭은 이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이에 영국올림픽위원회는 파리 조직위원회에 조정을 거듭 요구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그런데, 에릭은 게시판을 주목해 보았다. 그리고 400미터 경주는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에릭은 감독에게 찾아가 400미터 경주에서 달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관례상 없었던 일이었지만, 감독은 허락해 주었다.
감독은 에릭을 100m 대신 400m에 출전시키기로 하고 6개월 정도를 앞두고 400m 연습에 돌입했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여론은 에릭을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다행히도 에릭을 대신해 100m 경기에 출전한 ‘해롤드 아브람스’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에릭은 100m 예선 경기를 하던 7월 6일 주일에는 ‘스콧츠 커크’ 장로교회에서 평소처럼 성도들에게 간증하였다.
에릭은 주 종목이 아니었던 주일에 경기가 열리지 않는 종목에 일단 참가하여 7월 9일 예상을 뒤엎고 200미터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한다.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여론도 그에 대해 다소 누그러졌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