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전차로 영화화’ 아카데미 4개부문 수상 휩쓸어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 지휘자 사이먼 OST 연주
● 하나님의 도움 ‘400m를 100m처럼’
하지만 400미터는 에릭의 주 종목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에릭은 예선 경기에서 이겼다. 그리고 그 다음 경기에서도 이겼다. 마침내 에릭이 준결승전을 치렀고, 그리고 올림픽 최고의 시합으로 생각하는 결승전에 임하게 된다. 결승이 열리던 그 날은 올림픽 역사 상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전대미문의 매우 더운 날씨였다.
400m는 올림픽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경기가 되어 있었다. 사실 400m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다. 예선에서만도 스위스의 ‘임바흐’, 미국의 ‘피치’ 같은 선수들은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후보로 각광을 받았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에릭은 담당 안마사가 쥐어준 쪽지를 깊이 마음에 새기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In the old book it says, ‘He who honours me-I will honour’ Best wishes always)
이 쪽지를 읽은 에릭 리들은 자신이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마자 에릭은 처음부터 전력질주한다. 에릭 리들은 신들린 사람처럼 첫 코너를 돌았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며 한 목소리로 불안함을 표현하였다.
관중들은 “아니 400m를 100m처럼 달리다니, 역시 100m 선수라서 어쩔수 없어. 처음부터 저렇게 속도를 내다니! 쯧쯧” 하며 에릭을 비웃었다. 그런데 200m 또 300m도 동일한 속도였다. 에릭은 400m를 똑 같은 속도로 달려 47초 6으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가 남긴 “처음 200미터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 ‘금의환향’ 올림픽 영웅이 ‘중국 선교로’
올림픽 이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에릭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만 간다. 하지만 에릭은 수많은 강연의 자리를 물질과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는데 사용했다. 그의 육상에서의 성과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의 생애를 통틀어 우선 제1의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이었다.
파리 올림픽이 끝난 일주일 후 에릭은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축하식장에서 졸업 후의 소감을 묻자 “저는 중국으로 가서 저의 생애의 남은 부분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바치고자 합니다.” 하고 대답해서 다시 영국 국민들을 놀라게 한다.
결국, 에릭은 화려한 올림픽 영웅으로서의 삶을 뒤로 하고, 1925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고통과 절망의 나라인 중국으로 선교를 떠났다. 에릭은 중국이 아편전쟁과 의화단 사건으로 가장 시끄러울 때 중국으로 건너가 청년 전도에 헌신한다.
먼저, 에릭은 중국 천진에 있는 중영학교의 교사로 들어간다. 이 학교는 중국의 중류층 자녀들이 다니면서 영어와 근대 과목을 배우는 기숙학교였다. 이곳에서 에릭은 10년간 교사로 사역하면서 중국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열성을 다해 전하게 된다.
● 샤오창 병원 ‘사역은 너무 열악’
1934년, 플로렌스와 결혼한 에릭은 아내와 함께 계속 중국 선교에 헌신한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분도 심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선교회에서 에릭에게 본인이 태어났던 샤오창으로 가서 사역해달라고 요청한다. 천진과 같은 도시에 비해서 샤오창과 같은 농촌의 상황은 너무 열악했다. 기도 끝에 이 부르심에 응답한 에릭은 이미 샤오창 병원에서 사역하고 있던 형 로버트를 도우면서 농촌 선교를 시작한다. 다시 한 번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당시 샤오창의 상황은 너무도 처참했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고, 환자들도 속출해서 병원 사역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갔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환자를 이송하거나 약품을 운반하기도 하고, 검문에 걸리거나 산적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40년에 마침내 샤오창의 선교부를 폐쇄하고 외국인들을 억류하기 시작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로 도피시킨 에릭은 결국 1943년에 웨이시엔 수용소에 수용된다. 이제 미국이나 영국은 일본의 적국이었다. 그곳에는 11개국의 1,800명의 서양인들이 구류된다.
에릭의 구금된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음식과 옷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화장실 시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용소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열악한 시설과 부족한 배급, 일본군의 감시와 학대로 모두들 지쳐가던 그곳에서 에릭은 빛과 같은 존재였다.
누구라도 어려움이 있을 때는 자기의 것을 기꺼이 나누었다. 그렇게 에릭은 온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이제 수용소가 그의 선교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섬기던 에릭은 결국 너무 쇠약해져서 쓰러진 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1945년 2월 21일, 43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수용소 병원은 그와 같은 질병을 수술할만한 장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에릭 리들 ‘불의 전차’ 영화화
에릭 리들의 실화는 휴 허드슨 감독의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고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빰 빰빰빠 빰빰 빰 빰빰빠 빰’하면서 연주되는 그 유명한 반젤리스의 ‘불의 전차’(Chariot of Fire) 주제 음악이다.
영국의 영화감독인 ‘데이빗 푸트남’(David Puttnam)은 온 세계 사람들이 올림픽에서의 금메달보다 자신에게 더 소중한 것을 위해서 타협하기를 거절하고 굳은 확신을 따라 행동했던 겸손한 스코틀랜드의 출신의 올림픽 선수인 에릭 리델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의 전차’라고 하는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불의 전차’는 영국 영화임에도 1982년 미국의 제54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뛰어난 작품성과 영상미로 인하여 오스카 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및 의상상을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아카데미상뿐만 아니라 1981년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1981년 칸느영화제 남우주연상, 심사위원 특별상, 뉴욕 영화비평가상 감독상, 작품상 등 그해 영화제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은 기록적인 작품이었다.
그런데 푸트남은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해 극적으로 묘사한 '한밤의 급행열차'(Midnight Express)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막 제작했다. 그 영화는 매우 쓴맛을 남기는 냉소적인 영화였다.
그 영화가 영화계에 등장해서 큰 흥행을 거두게 되자, 데이빗 푸트남은 오히려 크게 실망을 했다. 그는 에릭의 이야기가 카타르시스 역할을 할 것이라고 즉감했다. “세상에서의 성공보다 하나님을 향한 의무에 더 헌신했던, 그래서 무언가 더 위대함을 나타내는 한 사람이 있다.”
'불의 전차'는 가장 올림픽과 관련이 깊은 영화이자 영국의 육상스타를 모델로 한 것이기에 이 영화에 삽입된 OST는 지구촌 최대 스포츠축제인 2012년 7월 28일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연주되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경은 영국을 대표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화 ‘불의전차(1981, Chariots Of Fire)’ 테마뮤직을 연주했다.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영국의 국민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로 등장해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뉴욕 영화 비평가인 렉스 리드(Rex Reed)는 그 영화를 가리켜 “지금까지 제작된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다. 에릭 리들 선교사의 이야기는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선교사 전기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책으로 발간되면서,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박광희著 두레마을刊) 라는 제목으로 책으로도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