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김일성과 패권을 놓고 벌인 권력투쟁에서 패해 숙청된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뒤에는 우리들에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이 있었다.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는 박헌영을 따라 남한 대신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이란 이유로 1956년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시절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박헌영의 혁명사상과 인간적 면모에 끌려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꿈꿨던 한 여인의 삶은 냉전체제의 파열음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는 격동의 시대 수레바퀴에 으깨진 현앨리스(1903~1956?)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다. 그의 비극은 단순히 한 개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들과 직계가족, 재미 한인 진보진영으로까지 확산된다. 식민체제, 분단, 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음모, 공작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앨리스는 1955년 북한이 부수상 겸 외상이었던 박헌영을 ‘공화국 전복’ 등 혐의로 기소할 때 ‘박헌영의 첫 애인’으로 지목됐다. 둘의 특수한 관계가 박헌영으로 하여금 그의 북한 입국을 돕게 만들었으며, 그 덕에 현앨리스가 북한에서 안정적으로 미국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북한의 논리는 흘러간다.
 

저자인 정병준 교수(이화여대 사학)는 그러나 “현앨리스는 3·1운동기에 독립운동을 상하이와 전 세계에 알린 현순 목사의 맏딸로, 박헌영과는 애인 사이가 아니라 오누이처럼 지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체코 프라하에서 발굴한 관련 자료, 증언들을 종합한 결과다.

■ 미국의 첩자?

이념을 좇아 북 택했지만 박헌영 처형 직후 같은 운명
 

 현앨리스와 박헌영의 첫 만남은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운동 당시 반일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운 박헌영은 그해 11월 상하이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듬해 4월 상하이 상과대학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 모임인 ‘화동유학생회’ 회장을 맡은 박헌영은 이 시기(1920~1921) 상하이 중국인 기숙학교를 다녔던 현앨리스와 화동유학생회에서 조우했을 개연성이 높다.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이었던 이들에게 상하이는 분명 가슴속에 뜨거운 무언가를 샘솟게 만드는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제국의 붕괴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흐름은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상하이 체류 기간은 1년7개월에 불과했지만 독립운동, 혁명운동의 모험담과 도전정신으로 가득한 당시 상하이 분위기와 맞물려 박헌영의 정신세계는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를 향해 치달았다. 동지들과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해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지도자들과 그들이 실현해놓은 세계를 직접 본 박헌영은 이후 ‘강철의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책에서 현앨리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을 지닌 여성으로 나온다. 3·1운동 때 일제에 맞선 소년 독립운동가 출신의 정준과 결혼했지만 그가 총독부 산하 경상남도청 관리가 되자 돌아선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 문화를 경험하면서 확립한 가치관도 남편과 큰 차이를 보였다. ‘예전의 한국 습관’대로 행동하고 후처를 두는 남편을 엘리트 신여성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4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현피터, 현앨리스 남매, 부친인 현순 목사다.


 

■ 북한의 간첩?

미군정 영관급 통역 근무 중 ‘마타하리’로 의심 받아 추방
 

 현앨리스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 사회의 좌파적 흐름, 해방 후 한국 상황에 영향을 받아 남동생 현피터와 함께 재미 한인사회의 가장 급진적 집단에서 활동한다. 정확한 실체는 여전히 미궁 속이지만 상하이 시절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접한 그는 조선, 일본,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미국공산당 관련 연락 임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들이 원한 건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것이었다. 분단·군정을 뚫고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꿈꿨다. 현실은 달랐다. 미국, 소련이라는 거대한 자기장이 한국인들을 ‘책받침 위의 쇳가루’처럼 힘의 서열에 따라 재배치하고, 좌우익 분열이 극에 이르러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들은 그러나 반미·좌익 인사를 통제, 관리하려는 주한미군사령부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 소속 고위 군속으로, 영관급 통역으로 남한에 와서도 의식세계는 북한을 향했다.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을 데리고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수차례 만나는 등의 행보는 급기야 미 군정의 의혹을 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들의 삶은 파국적 종말을 향하기 시작한다.
 

현앨리스는 1946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재미 한인 진보진영의 주간신문 ‘독립’에서 이승만·김성수 등 남한 우파를 비판하는 글을 싣는 활동을 하다 1949년 말 체코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정치적·사상적 이상향으로 선택한 북한이었다. 미군 근무 경력을 가진 현앨리스의 북한 입국을 도운 건 1948년 9월 월북해 당시 권력 2인자이던 박헌영이었다. 하지만 이는 박헌영의 결정적 실수였다. 박헌영도, 현앨리스도 이를 빌미로 모두 제거된다. 1955년 열린 박헌영 공판은 하루 만에 종결됐고 사형이 선고됐다. 현앨리스도 1956년 박헌영 처형 직후 처형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지은이의 분석이다. ‘이념과 사상의 조국을 북한에서 찾으려 했지만 그를 기다린 건 비극적 삶을 완성하는 죽음의 심연’(393쪽)이었던 셈이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무장투쟁만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길이라 생각, 미군에 복무한 경력은 북한에선 스파이 경력으로 둔갑했다. 미·소 냉전과 한국전쟁은 양 진영에 모두 공포와 두려움, 자기검열을 불렀다. 확실하지 않으면 모조리 의심의 대상이었던 시대, 어떤 비판도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돼 간첩과 파괴분자가 무수히 양산되던 마녀사냥의 시대적 흐름을 한 개인이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평양에 가기 전 체코에 머물 무렵 아들 정웰링턴(뒷줄 오른쪽 끝)과 함께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평화대회에 참석한 현앨리스. 모자의 어두운 표정에서 향후 평양과 프라하에서 이들이 각각 겪게 될 이질감과 고뇌가 느껴진다. 앞줄에 앉아 있는 이들이 북한 대표단이다.
 

■ 그녀는 묻는다

 여전히 진영논리 갇힌 지금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냐고
 

 외과의사로 일하던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도 1963년 10월28일 체코의 소도시 헤프에서 독극물을 삼키고 36년의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가 처형된 북한도, 외삼촌들이 청문회에 소환돼 공산주의자냐는 힐문을 당하는 미국도 그가 갈 곳은 아니었다.
 

자료의 한계 등으로 현앨리스의 행적과 비극적 삶의 실체를 완전히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저마다 통일을 외치지만 진정 하나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여전히 진영논리에 가로막혀 진정한 대화와 토론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고,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현앨리스가 우리에게 “과연 지금은 해방공간 당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