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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5/03/24 12:50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4)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下)

■ 큰 사건에 가려진 서울대 의대생들의 수난
 

흔히 ‘긴급조치 1호 사건’ 하면 앞서 살펴본 세 사건처럼 재야 지도자나 종교인이 구속된 큰 사건만 거론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긴급조치 1호로 처벌받은 사람은 많았다. 여기에선 당시의 판결문 등 기록과 자료에서 확인되는 ‘피고인’들의 저항과 수난에 대해 잠시 살펴봄으로써 큰 사건의 그늘에 가린 그들의 고난을 ‘다시 보기’하기로 한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이근후(23), 김영선(23), 김구상(24)은 1974년 1월18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의대 도서관에서 ‘새해가 되면 지난날의 모든 어려움을 씻어줄 새 날이 올 것을 기대했건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더 굵은 쇠사슬과 더 큰 자갈뿐이 아니었던가?’로 시작해 1·8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독재적 탄압조치라며, 그 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 일동 명의로 된 격문(檄文)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학우들과 1·8 긴급조치의 철회와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8 긴급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라.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널리 알렸다. 위의 세 학생은 곧 검거되었고, 헌법 개정의 청원을 선동하고 긴급조치 1호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이근후는 징역 10년, 김영선·김구상은 각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74 비보군 형공 제6호 사건 판결).

일러스트 | 박건웅


■ 민주통일당 간부들의 징역 15년, 그리고 민초도


정치권에서는 민주통일당의 간부들이 긴급조치 1호에 도전하고 나섰다. 정동훈(42·노동국장), 유갑종(41·당무국장), 김장희(37·청년국장), 김성복(43·국제부국장), 권대복(41·조직국장) 등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당 최고위원 장준하의 석방과 아울러 긴급조치 1호의 철회를 거듭 요구하였다. 그들은 모두 긴급조치 위반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넘겨졌고, 정동훈·김장희·김성복은 각 징역 15년, 유갑종·권대복은 각 징역 12년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았다(74 비보군 형공 제7, 8호 사건 판결).


한국신학대학을 중퇴한 정복민(40·무직)은 자기 집에 온 젊은이에게 “박정희가 세 번 터트렸는데, 3선 개헌, 10·17 선언, 그리고 이번 긴급조치, 이것은 다 현 정권이 무너지는 징조다. 개헌 서명운동을 내버려두면 개헌이 되는 것이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정권을 뺏길 테니까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했다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74 비보군 형공 제5호 사건 판결).


■ “박정희 여순반란 때…”로 12년 징역


이처럼 긴급조치 위반으로 황당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비단 종교인, 지식인, 학생 그 밖의 소위 운동권뿐만이 아니었다. 자영업자, 회사원, 농부 등 평범한 민초들도 적지 않았다. 죄목(?)도 비단 유신헌법 반대나 개헌청원뿐 아니라 유언비어 유포(긴급조치 1호 3항)로 걸린 사례도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농부인 박모씨는 이웃들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을 지낸 사람인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말했다가 끌려가 무려 12년형을 선고받았다(2007년 1월25일자 동아일보). 중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최모 교사는 수업시간에 “유신헌법은 장기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제도로 대통령을 간접선거하는 것은 나쁜 제도”라고 했다가 8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다. 재야인사나 학생들이 무더기로 당하는 대형 조작사건 외에도 일반 시민들이 술김에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가 징역을 산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 사건’도 자주 화제가 되었다.


■ 대폿집에서 한 취중 일성으로 10년 징역


윤석규(26·무직)라는 청년은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 저녁, 서울 명륜동에 있는 대폿집에서 친구인 서울대 학생 두 사람에게 “이번 긴급조치는 오히려 현 정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최후 발악이며, 개새끼들 지랄이다. 이번 조치로 인하여 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외국의 대한 원조가 중단될 것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였다며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변호인은 피고인이 당시 음주 만취로 인하여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판결은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당시 다소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나 증인 허한무의 진술 내용과 일건 기록을 정사하여 보면, 피고인이 음주로 인하여 심신미약의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할 자료가 전혀 없으므로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거창하게 판시하고 있다(74 비보군 형공 제4호 판결문). 이처럼 취중에 몇 마디 했다가 10년 징역을 살게 되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


■ “그럴 것이다” 공감 표시했다가 징역 3년


기독교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는 오봉균(27·무직), 김태수(32·무직) 두 사람은 각 징역 3년의 형을 받았다. 15년, 10년에 비해서는 가벼운 편인데, 도대체 무슨 말이 화근이 되었을까. 오씨는 제과점에서 김씨를 만나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하여 민주적으로 헌법을 개정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1·8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할 말도 못하고 벙어리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어떤 교회 사무실에서 직원에게 “학생들이 개학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팽이는 때리면 때릴수록 잘 도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통령을 지칭하여 “이놈아들, 머리 잘 쓴다. 개헌 청원자가 날로 늘어가니까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씨의 말에 “그럴 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이런 말들이 모두 긴급조치 비방에 해당된다고 해서 징역 3년씩을 받게 되었다.


■ “모 대학 교수 자살 조작…”에 징역 5년


강원 속초에 사는 김준길(44·무직)은 속초 시내의 한 다방에서 “정부가 물가를 조정한다고 하면서 물가가 오르기만 하니 정부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 “지난번 중앙정보부에서 모 대학 교수를 잡아다 조사를 하다가 때려죽이고서는 자살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니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를 영국으로 도망 보냈다”고 한 것이 긴급조치의 ‘유언비어 날조 유포’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징역 5년이 떨어졌다(74 비보군 형공 제10호 사건 판결). 또 연세대학교 학생인 고영하·황규천 각 징역 7년, 이상철·문병수·김석정 각 징역 5년, 서준계·김향 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학원강사인 윤석규 징역 7년 등 여러 사람의 묻힌 고난도 잊지 말아야겠다(<70년대의 민주화운동>).

긴급조치 1호는,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응징하겠다는 비상수단이었다. 그러기에 같은 동기와 원인에서 빚어진 탄압사건이라면, 그 죄명이 무엇이든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과 그에 따른 수난이라는 성격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탄압의 사례로 1973년 5월의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사건(‘민우’지 사건), 같은 해 3월의 전남대 ‘함성’지 사건, 같은 해 11월 고려대의 ‘검은 10월단 사건’(‘야생화’ 사건), 1974년 1월의 ‘기독공보’ 고환규 편집국장 연행 고문 사건, 그리고 소위 ‘문인간첩단’ 사건(‘한양’지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 긴급조치와 동시 상영 ‘문인간첩단’ 사건 등


특히 ‘문인간첩단’ 사건은 긴급조치 1호가 나오기 바로 전날(1974년 1월7일) 문인 61명의 이름으로 나온 (유신헌법) 개헌 지지성명과 관련하여 주목을 끌었는데, 그 시기로 보나 서명자들의 면면으로 보나 탄압사건이라는 의혹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문인들의 성명이 나온 지 20일 만인 1월28일, 긴급조치 1호의 폭음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5명의 문인들이 보안사령부에 구속되었으니, 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성명에 서명한 사람 중에는 박 정권의 유신통치에 비판적인 문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검거된 문인은 이호철(소설가), 임헌영(문학평론가), 김우종(문학평론가), 정을병(소설가), 장백일(문학평론가) 등이었는데, 그중 이호철·임헌영 두 사람이 위의 문인 성명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공소사실의 요지는 문인들이 일본에서 발행되는 우리말 월간지 ‘한양’의 관계자들(조총련계)로부터 금품과 접대를 받았으며, 그 잡지에 기고를 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보안사에서 씌운 간첩 혐의는 공소사실에서는 사라졌으나 계속 ‘문인간첩단 사건’이라는 용어가 따라다녔다. (굳이 말하자면 ‘한양지 사건’ 정도로 불리는 것이 옳다.) 그런데 위 잡지는 창간 초부터 한국 문단의 저명한 문인들이 대거 축사나 원고를 보냈고, 조총련계 자금으로 운영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양’지는 국내에도 수입이 허용되어왔고, 주일 한국공보관에도 진열되어 온 터였다. 그리고 많은 문인, 학자들이 혐의사실의 근거 없음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정을병만 무죄가 되고,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원고료를 받은 것도 반공법상의 금품수수로 단죄되었다. 문단 내지 지식인 사회에 두려움과 몸조심 풍조를 불러일으킨 성과(?)를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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