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쓸모없는 놈, 언제까지 게임이나 할 거냐. 나가서 쓰레기나 버려라." 벌써 몇 번째 고모의 잔소리가 계속됐지만 중학교 1학년
준혁이(가명)는 들은 체도 안 했다. 몇 시간째 컴퓨터 격투 게임만 하고 있었다. "게임 그만하고 쓰레기 좀 버리라니까!"
고모가 다시 소리쳤다. 준혁이가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자 고모는 준혁이와 동생 수혁이(가명)를 거실로 불러 꾸짖었다. 게임 좀 그만하고, 제발 학교 좀 가라…. 》
30분쯤 혼났을까, 준혁이는 세수를 하고 오겠다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준혁이는 화장실 한쪽에 걸려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수건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컴퓨터로 시끄러운 음악을 튼 후 볼륨을 높이고 거실 형광등을 껐다. 그러고는 거실에 서 있던 고모에게 달려들었다.
준혁이는 키가 170cm나 됐다. 또래보다 덩치가 좋았다. 준혁이와 고모는 거실 바닥에 같이 넘어졌다. 준혁이는 고모를 깔고 앉아 수건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고모는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쳤지만 비명 소리는 바깥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고모가 축 늘어지는 것을 보자 이번에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떨고 있는 동생에게 다가갔다. "형, 제발 살려줘. 내가 잘할게. 내가 형 말 잘 들을게." 준혁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혁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수혁이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고 왼쪽 눈을 감싸 쥐었다. 준혁이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수혁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형, 절대 말 안 할게. 내가 본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준혁이는 재차 확인을 받고서야 수혁이를 놔줬다.
준혁이는 고모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고모는 평소 교회 지인들과 연락이 잦았다. 준혁이는 고모의 휴대전화로 친한 교회 아주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족들과 여행 가니까 찾지 마요." 그러나 고모는 전날 김장을 하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배추를 절여 놓고 헤어진 터였다. 그런데 오후 10시경 갑자기 여행을 간다는 문자와 다음 날 아침에도 주차장에 그대로 세워진 차…. 이상하게 여긴 지인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고모는 어머니에 이어 2011년 아버지까지 잃은 준혁이와 수혁이를 거둬 키웠다. 13세 준혁이가 고모를 죽인 이 사건은 지난해 12월 중순 세상에 알려졌다. 형법상 만 14세가 돼야 형사 처벌이 가능한 탓에 경찰은 준혁이를 체포도 할 수 없었다. 형사미성년자 규정을 낮춰야 한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당시 언론에는 형제가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고 보도됐지만 사실은 달랐다. 준혁이의 아버지는 2011년 준혁이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날은 추석 다음 날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준혁이, 수혁이와 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아버지는 방 한쪽에 놓여 있던 작은 갈색 병을 집어 들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준혁이는 아버지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거실로 뛰어나간 준혁이 눈에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급하게 물을 찾았다. 준혁이는 아버지에게 물을 먹였지만 아버지는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준혁이는 전화를 찾아 119를 눌렀다. 그렇지만 농약 한 병을 다 마신 아버지를 살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어 갔다. 준혁이가 열 살 때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준혁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일곱 살 때 엄마를 잃고 아버지까지 잃자 준혁이는 보호자 없는 신세가 됐다. 준혁이와 동생은 고모가 맡았다. 남편과 둘이 살던 고모는 준혁이와 동생을 잘 보살폈다.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고 좋은 옷을 골라 입혔다. 주변 사람들은 '친자식한테 하는 것보다 더 잘한다'고 입을 모았다. "애가 고모를 죽였다 그랬을 때 우리가 다들 '제가 제 복을 걷어찼다' 그랬어요." 고모부도 따뜻한 사람이었고 생계를 꾸리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고모보다도 고모부가 더 좋다고 얘길 하더라고요." 준혁이를 돌봤던 학교 선생님들은 준혁이가 고모부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했다고 말했다.
2014년 3월, 준혁이는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입학식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준혁이 고모에게 준혁이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권했다. 준혁이는 근처 대학병원에서 심리검사를 받았다. 상담치료뿐 아니라 약물치료도 필요할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고모는 완강하게 치료를 반대했다. "우리 애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정신과를 가라고 합니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이 남으면 군대에 가는 것도, 취직도, 그 흔한 보험 가입도 어려워진다는 게 고모의 생각이었다.
준혁이가 좋아했던 고모부는 그해 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고모부는 치료차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입원했다. 고모는 밤낮으로 남편을 간호하고 1, 2주에 한 번씩만 집에 들렀다. 시청 사회복지사들과 지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밥이나 청소 등 집안일을 챙겨 줬지만 준혁이를 보살펴 줄 '보호자'는 없었다. "아이가 몇 달을 그냥 방치됐던 거예요. 자기를 내버려뒀던 고모가 미웠겠지요." 고모의 지인은 당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준혁이는 아예 학교에 안 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준혁이의 결석일수는 점차 쌓여 갔다. 8월 중순, 학교는 준혁이에게 유예 처분을 내렸다. 1학기 출석일수 100일 중에서 30일만 출석했다는 이유였다. 다음 해에 다시 입학하게 하는 유예 처분은 퇴학 처분을 할 수 없는 중학교 의무교육에서 가장 엄한 벌이었다. 준혁이에게는 그야말로 갈 곳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 줄 사람도 없어졌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난 10월, 암으로 투병하던 고모부도 세상을 떠났다.
준혁이는 불과 6년 남짓한 동안에 어머니와 아버지, 고모부의 죽음을 차례로 겪었다. 중간에는 할머니와 큰아버지의 죽음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준혁이에게 "부모의 역할을 '대치(대신)'할 어른이 없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준혁이는 일곱 살 때 엄마가 살해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준혁이 어머니는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관광통역원으로 일하던 엘리트 조선족이었다. 준혁이 아버지와는 사이도 좋았고 살림도 잘 꾸려 재산을 불려 나갔다. 준혁이 어머니는 혼자 사는 시숙이 보기 딱해 다른 조선족 여인 A 씨를 소개해 줬고 둘은 2004년 결혼했다. 처음에는 잘 지내는 듯했지만 곧 준혁이 큰아버지는 A 씨가 수입을 숨겨 따로 챙긴다고 의심했다. 결국 A 씨와 갈라서자 준혁이 큰아버지는 "일부러 위장결혼하려는 사람을 소개해 줬다"고 여기고 앙심을 품었다. 2008년 12월 중순경, 준혁이 큰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준혁이 어머니를 찾아갔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장해 준혁이 어머니를 차에 태운 큰아버지는 인적이 드문 국도변으로 갔다. 큰아버지는 준혁이 어머니에게 '왜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줬느냐'고 따져 물었다. 화를 내던 큰아버지는 준혁이 엄마의 목을 졸랐다.
준혁이 아버지는 아내를 죽인 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준혁이 아버지는 "남은 가족을 위해 형을 세상과 격리해 달라"고 재판부에 읍소했다. 큰아버지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만에 준혁이 큰아버지는 교도소 안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친형의 발인 날, 준혁이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 이후 한 번도 왕래 없이 지냈던 큰형이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른 지 하루 만에 준혁이와 동생을 두고 아내와 형을 따라갔다.
준혁이가 고모를 죽인 것을 알게 된 경찰은 고민에 빠졌다. 준혁이는 범행을 인정했지만 체포할 수 없어 임의동행으로 경찰서에서 조사했다. 사건을 넘겨받을 법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사미성년자의 살인은 선례를 찾기 어려웠고 절차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결국 준혁이는 법원의 보호조치명령을 받아 소년분류심사원에 입소했다가 한 달 만에 소년원으로 옮겨졌다. 올해 1월 19일 소년부 재판을 받은 준혁이는 소년법 중 가장 엄한 처분인 소년원 2년 송치 판결을 받았다.
▼에필로그▼
전문가들은 어렸을 적의 큰 트라우마를 가진 준혁이가 어머니의 죽음 직후, 늦어도 아버지의 죽음 직후부터는 심리 치료를 받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공포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분출하지 못하고 내면에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학교와 가정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아이가 유일하게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순간이 게임이었을 것"이라면서 "어머니의 부재가 가져온 분노와 게임하려는 욕구가 좌절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고모를
'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 범행은 인간의 존귀한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그 피해자의 유족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 반인륜적인 범죄로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다."
준혁이 큰아버지의 1심 판결문에 적힌 문구다. 준혁이도 똑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준혁이는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학교, 사회, 가정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범죄 피해자인 준혁이는 그렇게 가해자가 됐다.
준혁이가 2년 뒤 세상으로 나온 다음 어떤 치료와 어떤 처분을 받을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출한 10대 여중생이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여중생과 함께 투숙했던 남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행방을 쫓고 있다.
서울 봉천동의 한 모텔.어제(26일) 새벽, 두 남녀가 모텔 안으로 들어가고,두 시간쯤이 지난 뒤 남성 혼자 모텔을 빠져나왔다.
중학교를 다니다 가출한 뒤 성매매를 해오던 14살 H양이 한 남성과 투숙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여중생은 모텔에 투숙한 지 6시간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 여중생은 방 안 침대위에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고, 경찰은 함께 투숙했던 남성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