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일방일
사람의 욕심은 어디까지일까요? 재산도 많이 있고, 학벌도 좋고, 명예까지 있는 사람들이 권력까지 잡겠다고 허덕이다가 끝내 낙마하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야말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일방일(拈一放一)’이라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는 뜻이지요. 하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를 쥐려고 하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까지 모두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북송(北宋) 때 정치가이고, 철학자이며, 사학자로《자치통감(自治通鑑)》을 지은 사마광(司馬光 : 1019~1086)의 어린 시절(時節)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한 아이가 큰 물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어른들은 이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사다리와 밧줄을 가져와 요란법석을 떨었지요. 하지만 구출이 여의치 않아 물독에 빠진 아이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자 이걸 지켜보고 있던 사마광이 주변에 있는 큰 돌을 주워들어 그 커다란 물독을 깨트려서 물독에 빠진 아이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린 사마광은 고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장독쯤은 깨트려버려도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어린 아이도 아는 이 단순한 지혜를 왜 어른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을까요?
그것은 순수한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잔 머로 항아리 값, 물 값, 책임소재 등을 따지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정작 귀중한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뻔 했습니다. 더 귀한 것을 얻으려면 덜 귀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저 남방에 성성(猩猩)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이 힘센 성성이를 잡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성이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큰 술독을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성이는 그 술독을 보고 웃으며 지나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술 한 모금이야 괜찮겠지 하고 마십니다. 그리고 조금 가다가 되돌아와 조금씩 마시다가 나중에는 정신없이 술 한 동이를 다 퍼마시고 취해 나가떨어집니다. 이때 사람들이 힘들이지 아니하고 잡아가는 것이지요.
만약에 성성이가 술에 대한 집착(執着)을 버리고, 그냥 웃으며 지나갔던들 무사하게 지낼 수 있으련만 그 술의 유혹에 그만 생명을 잃거나 잡혀가 우리에 갇히는 것입니다. 더 귀한 것, 더 큰 것을 얻으려면 덜 귀한 것, 작은 것을 버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사람이 재색명리(財色名利)를 앞에 놓고 무심(無心)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심이란 아무런 생각과 감정이 없고. 세속적 욕망 가치판단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를 일컫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일에 차별과 구별도 없습니다. 선함도 악함도, 좋고 싫고의 경계도 없습니다. 그저 허공처럼 텅 빈 마음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대우주의 섭리에 따를 뿐이지요.
흰 구름은 그냥 일어났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가 무심히 사라지고, 물은 천성에 따라 아래로 흘러 바다에 이릅니다. 이와 같이 흰 구름과 물은 마음이 없기에 불평도 만족도 싫고 좋음도, 예쁘고 미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법을 이 무심에서 찾으면 어떨까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에 다툴 일이 없고, 여와 야도 없고, 진보와 보수도 없고, 전쟁도 없고 평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론 받아들이기 싶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도 개벽 되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우리들의 삶은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매사에 무심하고 삶에 즐거움이 하나도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즐거움이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즐거움의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원불교 성가 중에 무심에 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 ‘입정(入定)의 노래’를 소리 내어 낭송하면 어떨까요?
「예쁘고 밉고 참마음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참마음 아닙니다./ 허공처럼 텅 빈 마음 그 것이 참마음/ 이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마음 없습니다,/ 안에서 나가는 마음 업습니다./ 없다는 한마음 그 맘도 없습니다./ 없고 없고 없는 마음 그대로 그대로.」
이것이 우리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바탕에 욕심이 끼어들어 사람들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부귀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귀영화를 구하는 방법이 지나치면 곧 가패신망(家敗身亡)의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은 당연할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그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귀를 어떤 방법으로 구하느냐하는 것이지요. 그 부귀를 구하는 방법은 ‘정도(正道)’로서 구해야하고, 지나치게 ‘과욕(過慾)’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도로서 과욕하지 않고 구한 부귀영화는 충분히 누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不義)와 과욕으로 구한 부귀는 지탄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는 재앙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공자는 ‘의롭지 못한 부와 귀는 나에게 있어서 뜬 구름과 같으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부귀를 정도로서 구하지 않고 부정(不正)으로 구하려 하기 때문에 수많은 정 · 재계 인사들이 줄줄이 낙마를 하고, 엮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도인(修道人)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生死)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죄 복(罪福)의 이치를 알아서 죄 복을 임의(任意)로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합니다. 우리 이 ‘염일방일’의 진리를 알아 인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아가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9월 2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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