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민청학련 검거 회오리… 법정에선 우박처럼 ‘사형’ 구형이 쏟아졌다
■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
[한승헌 | 변호사·전 감사원장]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으로 처벌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도 불구하고 재야 민주세력과 종교계 일부는 남산(중앙정보부)과 삼각지(비상군법회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 돌파에 나섰다. 이런 시국에 대학사회도 침묵할 리가 없었다. 실인즉, 1973년 하반기에 달아올랐던 학원가의 유신 반대운동은 겨울 방학과 긴급조치 1호로 잠시 주춤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전국의 대학가에 심상치 않은 징후가 드러나는 가운데 산발적으로 학생들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런 긴장 속에서 4월3일에는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로 된 ‘민중 민주 민족 선언’이 살포되었는데, 거기에는 ‘…소위 유신이란 해괴한 쿠데타, 국가비상사태와 1·8조치 등으로 폭압체제를 완비하여 언론을 탄압하고 학원과 교회에 대한 억압을 가중시킴으로써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국적 민주주의인가?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숭고한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려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유신정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정면 포격이었다.
■ ‘사형!’으로 범벅이 된 광기의 초강수
바로 그날(4월3일) 저녁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또 하나의 초헌법적인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했다. 그는 담화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반국가적 행위를 전개하기 시작했음으로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고 했다. 모두 12개항으로 길고도 촘촘히 얽어놓은 긴급조치 4호의 첫 항은 이러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이하 단체라 한다)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건 독충이 기다리고 있는 거미줄이었다. 거기에다,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한 형벌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민청학련이나 그 관련단체의 구성원, 동조자, 회합한 자, 편의 제공자는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것. 그뿐만이 아니다. 민청학련 관련 문서 등을 제작 또는 소지한 자, 민청학련 구성원으로서 소정의 자수를 하지 아니한 자, 정당한 이유 없는 학생의 결석, 시험 거부, 교내 집회 등 집단행위까지도 줄줄이 ‘사형!’ ‘사형!’이었다. 긴급조치 1호와 마찬가지로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 ‘인혁당과 조총련 조종으로 북괴식 혁명 노려’
이러한 긴급조치 4호의 발동을 전후해 대학가에 일대 검거선풍이 불어닥쳤다.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 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여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동 인물로는 1)전 인혁당 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의 불순세력, 2)재일 조총련 비밀조직의 망원인 곽동의와 그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일본인 2명, 3)기독학생 간부진, 4)이철, 유인태 등 주모급 학생운동가 및 유근일 등을 지목했다.
긴급조치 4호를 걸어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연행 조사한 사람은 1204명이나 되었다니, 전무후무한 대량 검거였다. 이들 중에서 자진 신고자 266명을 포함한 745명이 훈방되고, 235명이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80명이 기소되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건은 몇 갈래로 분리되어 각각 별도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1)학생운동권 핵심인물과 기독청년 등 32명을 망라한 (좁은 의미의) 민청학련사건, 2)또 다른 청년 학생들을 묶어 따로 기소한 사건, 3)앞서 중정이 배후로 설정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4)일본인 기자 2명에 대한 별도 사건 등으로 분리 기소가 된 외에도, 5)자금 지원과 관련된 윤보선 전 대통령·박형규 목사 사건, 6)학생 선동혐의를 받은 김동길·김찬국 교수 사건, 7)천주교 측의 지학순 주교 사건 등 몇 갈래의 재판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사건이 이른바 긴급조치 4호 사건, 또는 넓은 의미의 민청학련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좁은 의미로는 앞서의 32명 그룹의 사건만을 ‘민청학련사건’이라고 부른다.
■ ‘김일성에 맞먹는’ 죄목들의 법정
내가 변호인석에 나섰던 이철 등 32명 그룹의 기소와 공소유지는 군 검찰관이 아닌 일반 검찰에서 파견된 검사 4명이 맡고 나섰다. 당시 정권 측이 이 사건의 ‘기획’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었는지를 알 만했다. 변호인단도 그 전의 시국사건 때와는 달리 훗날 ‘인권변호사’로 불리는 황인철, 홍성우, 강신옥, 이세중, 임광규, 박승서, 한승헌 등이 참여하는 강팀으로 맞섰다.
이 사건은 400여쪽에 달하는 공소장이 실로 방대한 공소사실로 넘쳐 있었다. 죄명 또한 어마어마해서 긴급조치 4호 외에도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상의 내란 예비 음모, 내란 선동, 여기에 긴급조치 1호까지 총 집결되어 있었다. 한 피고인이 “그때 김일성을 잡아다 재판을 했다고 해도 그 이상의 죄목은 더 달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5월27일에 기소된 이 사건은 6월15일에 첫 공판이 열렸다. 용산에 있는 국방부 근처의 퀀셋에 마련된 법정은 피고인과 헌병, 기관원, 기자, 가족들로 초만원이었다. 32명이나 되는 피고인 곁에 헌병이 한 사람씩 끼어 있었고, 방청석은 기관원과 기자들이 들어앉는 바람에 정작 방청객인 가족들이 앉을 자리는 아주 좁아 피고인당 한 사람씩만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기자들은 이전의 긴급조치 1호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메모조차 금지된 채 그저 방청만 하고 있었다. 피고인석의 면면들은 구속된 후 접견 한번 못한 가족들과 오랜만에 잠깐 눈길이라도 나누려고 뒤를 돌아보곤 했다. 6월 중순의 초여름 날씨치고는 무더운 데다가 법정 공방의 열기가 더하여 폭염을 느끼게 했다.
■ 발언 제지에서 퇴정 명령까지, 뜨거운 공방
단상 중앙에는 재판장인 박희동 중장이 앉아 있고, 그 좌우로 신아무개 소장, 박아무개 판사, 김아무개 검사, 그리고 군 법무사(대령)가 배석한 가운데 재판이 시작되었다. 장시간에 걸친 검사의 공소장 낭독에 이어 피고인과 검사 및 재판부 사이에 문답과 격론이 벌어졌다. 피고인들은 유신 통치를 공격하면서 자기들의 정당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공소사실에 적힌 인혁당 배후 조종이나 국가 전복 기도 혐의를 전면 부인했음은 물론이었다. 마침내 단상의 발언 제지가 빈번해졌고, ‘예,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라는 요구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재판은 단상의 발언 제지와 단하의 불응이 얽히는 가운데 마침내 경고, 휴정, 항의소동, 퇴정명령 등으로 혼란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면, 재판장(또는 법무사)이나 검찰관이 어디에선가 전달되는 쪽지를 받아보고는 밖으로 들락거리거나 휴정을 하기도 했다.
공소장 기재 순서인 이철, 유인태, 여정남, 정문화, 황인성, 김병곤, 나병식, 서중석 등은 신문의 순서일 뿐 아니라 형벌의 경중의 순서로도 예상되었다. 그만큼 앞쪽의 피고인들은 부담이 커서 많은 공격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 험난한 재판 과정을 통하여 피고인들은 북한의 통일전선전략 운운의 혐의를 일소에 부치고, 오로지 박정희 유신통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 변호인 연행 뒤, 사형 구형에 “영광입니다”
마침내 7월9일에 결심 공판이 열렸다. 검사는 지루한 논고문을 읽은 다음 구형에 들어갔다. “피고인 이철, 유인태, 여정남, 김병곤, 나병식, 김영일, 이현배를 각 사형에….” 이렇게 사형의 우박이 떨어지고, 이어서 무기징역, 20년, 15년 등으로 중형의 홍수가 넘쳐들었다. 이어서 변호인들의 변론이 시작되었는데, 그중 강신옥 변호사의 변론이 문제가 되어 휴정을 한 사이에 그가 중정에 연행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홍성우 변호사도 같이 붙들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강 변호사는 박 정권을 나치 정권에 비유하고, 피고인들의 투쟁을 정당한 국민 저항운동이라고 변호하던 끝에 “지금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 있는 저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다”라고 했다. 이렇게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재판의 끝 순서로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시작되었다. 맨 먼저 이철 피고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이라도 바칠 것이다. 반민족적인 유신체제의 철폐를 위해서는 언제까지라도 싸울 것이다. 하지만 유신을 반대한다고 해서 나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우지는 말라. 공산주의자로 터무니없이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겠다.”
모두가 단호하고 비장한 최후 진술을 했다. 그중에서도 김병곤은 “사형을 구형받아 영광입니다”라고 하여 법정 안을 더욱 숙연케 하였다. 같이 피고인석에 있던 김지하(영일)는 그 순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하고 엄청난 충격에 휘말렸었다고 훗날 회상기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