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강국 구태백제 이야기
요즘 ‘싸드’ 배치 때문에 우리나라가 소국(小國) 취급을 당하며 막대한 손해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우리 대한민국이 소국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오랜 옛날 우리 선조들이 세운 백제(百濟)에서는 중원(中原)의 나라들이 오히려 백제를 대국(大國)으로 섬기고 자신들을 소국으로 칭하며 조공(租貢)까지 바치고 백제의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난 9월 21일 우리 <덕화아카데미>에서는 제 2차 초청강연을 ‘서승 온다라역사문화원장님’을 모시고, 원불교여의도교당 대법당에서『아시아의 종가 동이강국(東夷强國) 구태백제(仇台百濟) 이야기』에 관한 특강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덕화아카데미>에서는 고대문명을 이룩한 선조들의 얼을 되새기고 잃어버린 고대사를 올바로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제 힘차게 두 번째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동이강국 구태백제’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사달(古朝鮮)이 저문 다음 다시 불을 밝힌 <부여(夫餘)>의 역사가 실종되어 우리 역사가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온통 사대주의에 입각한 수수께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나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식민사학, 또 우리의 몽유사학(夢遊史學)으로 어지럽혀졌습니다. 그러나 부여와 백제 역사를 제대로 밝혀보면 아시아의 종가 배달(倍達)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구당서 백제전》에 따르면,「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서해바다를 건너 월주(양자강 지역)에 이르고, 북으로는 발해만을 건너 고구려와 접하고, 남으로는 남해바다를 건너 왜(倭 : 일본열도)에 이른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시아 해상국가 백제의 기반세력은 고대부터 해상루트를 개척하여, 고인돌 ‧ 옹관문화를 유럽, 중동까지 전파한 서 남해 마한(馬韓 : 일본의 뿌리모국)의 해상세력이었습니다.
중국 정사에 속하는 주서(周書), 북사(北史), 수서(隨書)에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를 실존 인물로서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자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북사에 전해지는 구태의 기록은 이렇습니다.「동명성왕(東明聖王)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은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여 가(百濟)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이렇듯 중국 기록에서는 ‘구태’가 대방군의 옛 땅에 백제를 세웠고,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공손탁이 서기 2세기에서 3세기 초의 인물이니, 그의 사위가 된 구태 역시 그 시대의 인물일 것이며, 백제의 건국 연대도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기원전 18년보다 늦은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요.
해상강국 백제 시조 '구태'는 동명성왕 ‘고두막’의 후손인 부여의 왕이며,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 라는 것입니다. 백제가 중원에 진출할 시기에는 중국이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시기였고, 북방의 민족이 중국에 왕조를 세우고 흥망이 반복되던 시기였지요. 따라서 이런 혼란기에 백제가 중국 동부 지역에 진출한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태 왕의 자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고 천황이 된 것입니다.
한편 중원의 광서 장족 자치구의 모든 마을 이름이 모두 수록된 행정구역자료를 열람하면, 그 속에 선명한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백제향(百濟鄕)이지요. 백제향의 중심지는 백제 허(百濟墟)입니다. 허는 유적지로 이 지역이 백제의 유적지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백제 허를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 이름을 ‘대 백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백제 허에는 낯익은 나즈막한 부뚜막이 있습니다. 입식 구조의 한족부엌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한 옆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맷돌이 있습니다. 이것은 흔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전라도 맷돌과 꼭 닮았습니다.
또 다른 집에는 외다리방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쌍 다리 방아를 썼습니다. 이 외다리방아는 오직 전라도 지방과 일본지역에서만 전승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지역이 모두 백제권이라는 얘기입니다. 백제허의 사람들은 백제권의 생활문화를 이렇게 편린(片鱗)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산동 지방에서 왔다고 합니다. 산동 지역에서 왜 왔을까요? 옛날에 장사하러 왔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전쟁 때문에 왔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백제의 활동무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백제의 국호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수(隨)나라 역사서에는 백제를 일컬어 ‘동이강국’이라고 했으며, 건국 초부터 백가(百家)가 바다를 제패(制覇)했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라 정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백가제해(白家濟海)는 백가가 바다를 제패했다는 뜻입니다. 백제는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백제는 바다를 제패한 대 제국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거대한 해양제국이 왜 그렇게 쉽게 망했을까요? <일본서기 천지전황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서기 663년 ‘백제의 최후 거점인 주휴성 마저 함락되자 일본 땅의 조신(朝臣)들이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주휴성이 함락됐으니 이를 어찌하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겼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단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일본 땅에서 보면 구태가 세운 백제는 본국이었습니다. 서기 670년 왜(倭) 열도는 ‘일본’이란 국호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통전(通傳)>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본국백제가 멸망하자 성과 본국 근처에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차츰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군주인 부여순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부여씨는 소멸됐다. 백제 700년 역사, 그 장엄했던 백제는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저물어 갔다.」
어떻습니까? 저의 얕은 지혜로는 1시간 40분에 걸친 서승 원장님의 <동이강국> 백제에 대한 열강을 다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덕화만발] 카페 <덕화 아카데미> ‘초청강연 방’에 강연 전체를 동영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모두 한 번 보시지요! 우리나라가 결코 소국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어깨를 활짝 펴고 다함께 백제와 같은 대국의 꿈을 실현해 가면 좋겠네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9월 2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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