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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한스큉
사회

교회란 무엇인가 한스큉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5/03/30 11:44
1. 교회란 무엇인가?
한스 큉

스위스에서 출생 (1928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1948-55년) 사제
로 서품되었고 파리의 소르본느와 가톨릭 대학에서 신학 연구를 하였음(1955년). 거기서 박사학위 받
음(1957년). 고향에서 사목활동(1957-59년). 뮌스터 대학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신학 교수(1959-60
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하여 공의회 신학 고문으로 지명됨(1962년). 튀빙겐 대학에서 기초신학, 교의
신학, 에큐메니즘 연구원장(1960년 이래). 구미와 아시아의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대학에서
초청교수로 활약. 신학과 에큐메니즘에 관한 각종 정기간행물의 편집자 또는 편집 위원.
한스 큉 교회론에 대한 평가

큉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각 시대마다 특징적인 교회상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으며 온갖 종류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신학사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본질이 비본질적인 형태와 더불어 존재하
고 있다고 보았다. 교회 본질관을 논함에 있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 선포의 종말론적 성격과
그리스도 사건 전체에 근거하여 성립되는 교회의 생성을 고찰하는 가운데, 잠정적 성격을 띤 교회와
확정적이며 결정적인 하나님 나라 사이의 구별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를 “하나님 백성”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신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교회 내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리고 교회를 “영의 피조물”
로 고찰하는 가운데 교회의 모든 원천, 존재, 존속등은 성령에 예속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다양
한 은사와 신도들의 신앙의식을 유발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할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으
로서의 교회를 고찰하는 가운데 지방교회는 완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내적 본질 구조를 바탕으로 외적 직무문제를 거론하며 모든 직무와 공동체(교회)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근거는 대사제이며 중재자인 그리스도 자신에 있음을 보았고 일반 사제직을 강조 하
였다. 또한 교황의 권한은 봉사의 수위권일 때에만 진정한 존재의 의미와 성서에 기반을 둘 수 있다
고 보았다. 이와 같이 큉의 교회관은 교회의 외적 직무구조보다 은사적 직무에 더욱 큰 비중을 부여
함으로써 원시교회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며 제도적 교회관의 소극적인 관점들을 보완하여
모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적극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말씀의 신학에 따른 복음선포적 교회론에 깊이 접근해 있는 큉의 이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모든 그리스도교의 염원인 그리스도교 일치 문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또한 지나친 물질주의와 개교회주의 외형적 교세확정과 경쟁, 교파간 파벌간의 갈등이 첨예화 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회에 조용한 도전을 준다.
현대처럼 다양한 신학을 경험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실상 신학은 교회론에서 출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다양한 신학 사상사에서 교회는 주요 관심사에서 제외되어 왔다. 따라서 한국 개신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지나친 조직 중심의 개교회 주의로 치닫고 있으며, 외형적인
교세확정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가 하면, 물질주의로 치닫고 있어 오히려 선교대상인 세상으로 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에 한스 큉의 교회론은 성경적 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데에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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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변하는 교회
1, 현대교회의 과제
변했고 변하고 있는 현대세계의 일부요 바로 이 세계를 위한 존재인 현대교회는 실로 거대한 과업
들을 안고 있다. 전통과 형식에 매여 생기를 잃고 경화된 백성을 쇄신, 규합, 소생시켜야 하고, 교회
와 교회의 메시지를 멀리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해야하며, 그리스도 교회들의 재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즘을 추진해야 하고 다른 종교와 허심한 대화를 나누어야하며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증진하며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등 세계가 직면한 거창한 문제해결에 본연의 임무
를 다해야 한다.

2. 교회의 형태는 변한다.
교회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주어진 각 시대의 교회형태에 의존한다. 시대마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
에서 나온 교회상이 있다. 불변하는 본질적 요소가 있지만 그 본질은 변하는 현실의 형태 속에서 나
타난다.

3. 본질과 형태
1) 본질과 형태는 불가분이다. 본질과 형태의 구별은 개념상의 구별이지 실제상의 구별이 아니다.
2) 본질과 형태는 같지 않다. 교회의 본질과 형태는 동일시 할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본질은 역사적 형태 안에서 보아야 하고, 역사적 형태는 언제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서 이해해
야 한다.

4. 역사 속의 교회 상의 변화 (고. 중. 근대 교회론)
역사적 context 안에서 교회론이란 - 교회 자체가 인간을 위한 인간의 것이요,
시간과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인 이상 -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5. 전통주의와 현대주의
낡아버린 과거를 보존하려고 새로운 현재의 요구에는 무심한 보수적 태도와, 살아 있는 과거를 무
시하고 일시적인 현재의 새로운 변화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급진적 태도와의 중도를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론도 특정한 상황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특정한 세계와 시대의 설계와 신화, 환상과
결단, 이미지와 카테고리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

6.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원
교회의 근원, 본질, 즉 교회의 존립근거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이다. 이것의 원론적 메시지를 증거 하
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다. 교회론은 이 근원에서 나와야 한다. 성경은 교회 전통을 규정하는 규범이
며, 전통은 규정된 규범이다.

7. 근원적 설계의 현대적적용
신약의 교회는 우리가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상황을 무시하고 무조건 따라야 할 모델이 아니다. 교
회가 본질에 충실하려면 역사성을 지닌 교회로서 항상 변하는 세계, 항상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사는
세계 속에서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해야 한다. 신약성서상의 교회는 오늘날 우리
가 그대로 본 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시대에 적용하여야 할 근원적 설계다. 신약 성서
상의 교회 이외에 교회의 근원적 설계가 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B. 교회를 믿을 것인가?
1. 교회-찬양의 대상?
교회를 외면적, 피상적인 면에서만 보게 되면 찬양이 나올 수도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내적인 본질
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때이다.

2. 교회-비판의 대상?
또한 교회의 외모는 스캔들이 되며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 역시 신앙과 관련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3. 본질과 비본질
교회의 참 본질은 비본질 안에서 나타난다. 변하는 교회의 역사적 형태를 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선한 본질을 분별할 수도 없다. 본질과 형태, 영속하는 것과 변하는 것이 그렇듯이, 선과 악, 구원과
재난, 본질과 비본질도 서로 얽혀 있어서 인간의 지력으로는 완전히 풀 수가 없다. 교회론은 교회의
현상만을 척도로 삼아서도 그것만을 정당화 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근원적 메시지인 복음에서 출발하
여 개혁과 쇄신을 해야 한다. 교회의 비본질적인 면 즉 부정적인 면이 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직결되
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비 본래적인 것에서 본래적인 것을 찾아내고 모든 악한 본질에서 선한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자의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4. 신앙인 공동체
참으로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만의 관찰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교회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이며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신앙고백이 교회를 이해하는 기초이다.

5. 교회를 믿을 필요는 없다.
1) 우리가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
2) 우리가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바로 교회라는 뜻이다.

6. 교회를 믿을 수도 있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교회가 신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2)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신앙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비판, 신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신앙의 터전이요, 고향이다. 신앙과 교회
는 서로 의존하고 도와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근거는 오직 자비로운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안에
공동의 근거가 있다. 신앙도 교회도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신앙에도 교회에도
앞선다.

C. 교회의 근원
이제 참으로 중요한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신앙의 주체요 신앙의 대상인 교회, 이 신앙인 공동체
는 대체 누구를 믿는가? 역사적 존재인 교회, 이 역사적 순례단은 대체 누구에게서 오는가?

1.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바실레이아”, 이 말은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지배적인 중심 개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지배, 다스림을 의미한다. 즉, 완전히 실현된 최종적, 결정적 하나님의 통치가 한
사건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 자신의 최고 권능의 행사로서 나타나
며, 복수의 심판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순수한 종교적 지배,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양자택일을 의미하는 근본적 결단의 요구이다.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에 들어가기 위하
여 필요 불가결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이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막1:15)

2. 예수의 생애에는 교회 설립이 없다.
예수 자신은 교회와 과연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예수는 부활 전에 교회를 세운 바가 없으셨으며
특수 집단의식이 “남은 자”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모으러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 하에 사역하셨다. 부활 사건 이후에서야 비로소 초대교회 신자들은 “ 교회”를 말하고 있다.

3. 그러나 예수의 생애 없이는 교회도 없다.
부활 전의 예수는 설교와 활동에 의해 부활 후의 교회 출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예수 부호라 후
의 교회 출현은 부활 전 예수의 업적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왜냐면 예수 자신과 그의 업적은 미래를
약속하는 현재를 말해주고 있었고, 그것은 각 개인에게 신앙이나 불신앙이냐,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결단의 시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제자공동체가 곧 교회인 것이다.

4. 예수의 부활 이래로 교회가 있다.
교회는 부활 신앙의 시초부터 존재한다.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서
한데 모여, 약속된 하나님 통치의 완성과 부활한 그 분의 영광 중의 출현을 기다리게 된 이래로 교회
가 존재한다.

5. "교회“라는 말의 뜻
이 이름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는 흩어지고 감추어져 있
으나 장차 모여서 이루어질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가리켰다. 이에 해당하는 희랍어 “하나님의 교회”
가 새로운 공동체의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오늘날 간단히 “교회”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70인역에는
이 단어를 ‘카할’ 즉 “소집된 모임”으로 번역했다. 그 결정적 의미는 주님이 모으신 주님의 공동체 즉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공동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6. 집회-공동체-교회
“에클레시아”는 실제로 모이는 과정과 모이는 단체를 동시에 의미한다.

7. 지방교회와 전체교회
첫째, 지방 에클레시아는 전체 에클레시야의 “부분” 또는 “구역”이 아니다. 전체의 부속이나 하부조
직이 아닌 그 자체로서 온전한 교회이다.
둘째, 전체 에클레시아는 지방 에클레시야의 “집합” 또는 “연합”이 아니다.

D.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현재 속에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통치가 선포되고 실현되어지고 있
다하여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가 혼동되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로서
바실레이아의 완성을 위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과도기적 존재이며,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어
떤 경우에도 종교 정치적 신정체제로 등장할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의 능력과 활동으로 그 나라를 오
게 하고 건설 성취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교회는 자신의 과오를 알고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여 충심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그런 교회가 참교회다.



E.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를 성직화 해서는 안 된다. 언
제나 어디서나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 공동체이다. 또한 교회는
개개의 개인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코 단순히
종교적 동지들의 자유결사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참으로 교회는 만인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
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사랑 없이 교회는 없다. 그리고
교회는 이상적 존재가 아닌 역사상의 하나님 백성이므로 교회를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참으
로 하나님 백성이라면 어불성설인 것은, 교회를 모든 죄악과 불완전함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상의 현실 교회는 퇴색하여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거짓 후광에 싸인 이상으로 화하
고 만다. 성서가 증언하는 교회는 사죄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의 백성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

F.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
교회는 성령이 짓되 성령, 그 자체는 아니다. 성령은 어디서나 언제나 뜻대로 활동한다. 교회는 ‘성령
이 부여하신’ 카리스마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카리스마적 구조는 교회의 직무구조를 포괄하고 능가하
는 구조로서 논의되어야 한다. 공동체 내의 개인에 대하여 특별한 봉사활동을 부과하고 동시에 이
봉사활동을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름이다. 또한 교회 공동체 구성원 각자는 자기의
카리스마를 갖는다. 각자의 카리스마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며 서로가 교회
건설을 지향하며 주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 아래서 서로 섬김으로 질서를 지킨다.

G.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본질적으로 식사의 친교다. 본질적으로 친교요 일치요 상통이다. 주의 만찬은 교회와 교회의
여러 행위의 중심이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친교요, 그리스도 신자 상호간의 친교다. 그 안에 그
리스도의 현존이 있으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한 몸 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렇다고 개별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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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머리가 되시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자연적, 자동적,
존재론적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하에 의존하는 역사적 성장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다운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현실적 통치에 민감해야 한다. 교회 성장이라는 관념에
의해 그리스도의 통치가 흐려지거나 등한시될 여지가 없다.

H. 교회의 단일성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구교에서는 단일성, 성성, 보편성, 사도성을 들었고, 개신교
는 복음이 순수하게 가르쳐지고 성사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을 들었다. 교회의 본질적 요소들은 말이
나 법, 제도 등의 형식적인 것들의 보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교회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능력 있게 다양성속의 일치를 이루며 드러나야 한다. 이는 영적 현상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단일성이다. 중앙집권적 평준화나 전체주의적 획일
성이 아니라 여러 다양성 속에서도 한영, 한 주님, 한 몸으로서의 영의 일치에 의해서의 단일성을
추구해야 한다. 배타적 상이성을 지닌 신앙고백이 대립된 교파적 분열은 예배와 기본질서도 대립되고
결국 신앙과 성찬의 단일성도 파괴된다. 여기에 교회일치를 도피하는 4가지 이론이 있다. 1) 분열된
가시적 교회에서 분열 없는 불가시적 교회에로의 도피. 2) 교회 분열을 정상적인 교회 발전이요, 하나
님의 뜻의 결과로 봄. 3) 대립된 교회들을 한 나무에 달린 여러 개의 가지로 봄. 4) 단 하나의 경험적
교회만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동일시하고 다른 모든 교회는 교회로 인정하지 않음. 이에 대해 몇 가지
교회일치를 위한 신학적 지도 원리를 정립해 보자 : 1) 기존의 공통된 교회 현실을 인정할 것.
2) 요청되는 공통된 교회 현실을 찾아낼 것. 3) 그 공통점을 자기 교회 안에서 다른 교회를 고려하면
서 현실을 찾아낼 것. 4) 진리를 희생하지 말고 재발견할 것. 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것도
이 복음 전체를 일치의 규범으로 삼을 것.

I. 보편성. 성성. 사도성
1. “가톨릭”이란?
애초에 “가톨릭교회”라는 말은 논쟁적인 의미가 없이 지방교회와 구별되는 온 교회, 전체 교회를
뜻했다. 가톨릭성(보편성, 공변성)의 근본은 전체성에 있다.

2. 어떤 교회가 가톨릭인가?
이렇게 근본적으로 “가톨릭”교회란 온 일반의 전체교회라고 이해할 때, 단순히 지리학적 개념으로
공간적 외연이나, 통계학적 숫자적 양, 사회학적,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단순한 시간적 영속성만으로
그 기준을 삼을 수 없다. 국제적이고 규모가 크고 다양하고 오래된 교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충실하
며, 시대와 양상의 계속적인 변화와 불가피하고 온갖 약점과 과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디
서나 통합된 타당한 교회가 참다운 “가톨릭”이다.

3. 가톨릭교회 만을?
저자는 여기에서 구교와 개신교의 상호일치를 꾀하기 위하여 역사적 가톨릭교회를 어머니로 보고
그 밖의 교회들을 딸의 교회로 보고 있다.

4. 복음적 가톨릭교회를
교회의 완전한 보편성 회복 즉 교회의 단일성과 일치를 위해서는 개별교회들의 역사적 기원과
역사적 상호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비 가톨릭교회들은 직. 간접적으로 그들이 유래된 가톨릭과 화해
해야 한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직간접으로 자기에게서 유래한 교회들과 화해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5. 죄 많은 교회이자 거룩한 교회
교회는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이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이다. 죄 많은 동시
에 거룩하고, 거룩한 동시에 죄 많은 공동체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선발되어 나와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 속하는 성도들로서 다시 세상에 파견되어 있다. 교회는 따라서 모든 “속세”와 분리된 “성역”
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 말로 이미 본 바와 같이 예수가 말한 돌입한 하나님 통치의 의도

6에 반한다. 하나님 통치는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온 세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그리스도 신자에게는 그 자체로 불결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
된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것은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살고 행동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든 일상생활 중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말씀을 받아들여
믿고 순종하면서 자기가 받은 사랑을 다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곳이면, 거기
에는 거룩한 교회가 있다. 그리고 물론 동시에 이 거룩한 교회야말로 거듭 새로이 사죄를 받을 필요
가 있다.

6. 영속. 불후. 무류의 교회
교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한 조재로서 구별되어 있다-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다. 교회는
항상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회개와 쇄신에의 하나님의 요구이다. 교회는 또한 항상 구별되어
있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실성에 의하여 끈질긴 영속성으로 파괴될 수 없다. 항구한 불구속성
속에서 교회는 온갖 오해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진리는 보존되고 무오류성이 주어질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것을 안다. (Credo sanctam Ecclesiam)!

7. 사도직의 계송
사도전래의, 사도계승의 교회다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도직은 전체적으로 일회적이며
반복 불가능하다. 사도들의 설교는 어느 시대에나 기준이 되는 본래적, 기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그 일회성은 그 이후의 어떤 증언으로도 대체되거나 무효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이란 무엇인가? 사도적 사명과 봉사 즉, 과업과 직분의 존속에 사도적 계승이 있다. 이
사도적 계승을 누가 계승하는가? 근본적인 대답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교회라는 것이다! 소수의 개인이
아니라 온 교회가 사도들을 계승한다. 실질적 연속성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자신이 만들어 내는
연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주어지는 연속성이다.

8. 사도적 증언
직접적인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거쳐서 교회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사도
들의 증언을 통하여 주님자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교회 구성원들이 사도적 증언 즉 신약성서의
증언에 대한 경청, 존중, 신앙고백, 추종을 하는 데 있다. 즉, 사도가 전한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
들이고, 믿고 그대로 사는 데 있다. 사도적 계승은 근본적으로 사도적 신앙과 고백의 계승이다.
9. 사도적 봉사
교회는 봉사 없이 달리 사도들의 증언인 성서의 증언에 충실할 수 없다. 교회가 생생하게 그 증언
과 마주치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도들의 봉사의 모범을 따르고 있는 곳, 즉 복음전파, 증언하고,
세례주고, 공동체를 건설하며, 온 세상의 교회들과 유대와 일치를 도모하는 거기에 사도적 봉사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계승은 근본적으로 사도적 신앙과 고백의 계승만이 아니라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사도적 봉사의 계승이다.

J. 교회 내의 봉사
1. 유일한 대사제요 중계자인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고 행동하는, 바로 교회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사제직의
진리를 최종적으로 성취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유일한 신약의 대사제, 유일한 하나님 백성의 대리자
요 유일한 중계자이다. 그래서 이제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유일한 대사제요 중개자이신 분을 통하여
일반 사제직이 나온다.

2. 일반 사제직이란?
세례받은 신앙인인 그리스도 신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서 영적 제사를 드리며 말씀의 전파와
세례, 성찬, 사죄의 수행 그리고 세상에 대해 섬김과 봉사로 중개자의 역할을 해야 하며 이를 일반
사제직이라 한다.

3. 교회의 직무 담당자가 사제인가?
신약성서에 의하면 사제가 아닌 백성에 대립되는 사제직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온 새 백성이
사제단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난 수세기 동안에는 사제라는 이름이 거의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에
게만 유보되고 일반 사제직은 있다 해야 고작 기억에 남아 있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4. 지배관계?
사제, 성직자, 교직자 등의 말은 처음부터 신약성서에 의거한 용어들이 아니다. 에클레시아, 즉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이다. 그리고 따라서 모든 신앙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다! 그래서 일찍이 신약에서
는 ‘디아코니아’를 썼는데 이 말은 개인의 특별한 지위와 기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썼다. 이
말은 원래 희랍인에게는 열등한 존재로서 주인을 섬기고 봉사하는 의미로서 썼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은 이 말을 썼다.

5. 그리스도를 본 받은 봉사
예수의 제자가 되는 성립요건은 권리, 권력, 학식, 위엄이 아니라 봉사다. “남을 위한 존재”가 되는
일이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봉사에 의하여 증거된 바다. (막10.25: 마20:28)

6. 교회의 봉사구조
교회가 영적 은혜의 공동체라면 그것은 또한 봉사의 공동체다. 카리스마와 디아코니아는 상호
관련된 개념이다. 교회의 봉사구조는 카리스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카리스마에 있어서 다양성에 제한
이 없듯이 봉사구조도 마찬가지이다. 봉사구조 속의 하나로서 사목봉사라는 사도적 계승이 있다. 사목
봉사자들은 사도는 아니나 특별히 사도들의 과업과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한다. 그들은 일방적인 명령권을 가진 지배층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봉사직에 의하여 결정된
상하 질서가 존재한다. 안수를 조건으로 해서 봉사직들을 체계화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며 주교와
장로의 역할도 신학적, 교의적으로 상호 한계를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7. 사목봉사와 공동체
사목 봉사와 공동체를 연관시키는 동시에 구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목 봉사자들의 사도
적 계승은 목자들과 공동체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8. 베드로의 권한. 가톨릭의 견해와 개신교의 이의. 베드로의 봉사
사목 봉사의 특별한 사도적 계승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말한 바는 베드로의 봉사의 사도적 계승에
도 적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계승의 연쇄를 증명하는 사실의 면이 아니라 영의 계승이다.
베드로의 사명과 임무의 계승이요 베드로의 증언과 봉사의 계승이다.

9. 분파의 강령?
모든 교회는 각기 고유한 역사가 있고 그래서 다른 교회에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이를테면 “특색”이 있다. 가톨릭은 그 특색으로 교종이 있다. 그러나 가톨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교회들도 그들의 교종이 있다. 즉, 전통이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이 있고 자유교회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가톨릭의 교종직이 그냥 그대로 신약성서의 베드로의 봉사는 아니듯이 정교회의
전통도 그대로 사도적 전통은 아니요 프로테스탄트의 성경도 그대로 복음은 아니며 자유교회의 자유
도 그대로 하나님 자녀의 자유는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특색이라도 그것이 그 특색의 구호아래 교회
내의 권력 투쟁을 벌이는 파벌적 강령으로 화하고 만다면 그것은 구호의 남용이다. 인간을 돕고 해방
하는 메시지인 성경, 본래의 증언들에 충실한 전통, 교회에 대한 사심 없는 사목 봉사로서의 베드로의
봉사직, 성령아래 모인 형제들의 자유 - 이 모든 것은 좋은 것들이다. 배타적으로 오해되지 않는다면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에 쓰인다면, 그렇다면 언제라도
좋은 것들이다. 어느 교회도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어느 교회나 불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그때는 각 교회의 독특한 형태, 독특한 전통, 독특한 교리 중에서 얼마만큼이 나무요
건초요 짚이며 얼마만큼이 금이요 은이요 보석인지 무엇이 가치 없이 사라질 것이며 무엇이 소중하게
보존될 것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다.

K. 세계 속의 교회
교회의 현재는 세계 속의 현재다. 누누이 여러 각도에서 강조해 왔거니와, 참교회는 이상적이고
신성하고 영원한, 어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떠 있는 중간존재가 아니다. 참교회는 세게 안에서 세
계를 위하여 인간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교회다.
쿰란교파와는 달리 신생 에클레시아는 현세로부터 은둔하지 않는다. 신생 에클레시아는 자신이 다시
세상에 파견되었음을 자각한다. 세상과 구별되는 구원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에서 세상에게 자신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현세 추구나 현세 탐닉도 아니요 현세 도피나 현세 적대도 아니며
부정과 반항에 의한 긍정과 헌신이요 긍정과 헌신에 의한 부정과 반항이다! 교회는 이 하나님 자녀들
의 왕다운 자유에 의하여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먼 그만큼 내적으로 세계와 거리가 있는 동시에
세계가 하나님을 향하기로 되어있는 그 만큼 전적으로 세계에 참여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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