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날이 날이니만큼 이런 문장으로 시작해야할까. 아니, 오늘은 거짓말을 하는 날이니.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고 해야겠다. 그러니까 나는 거짓말하는 날에 거짓말을 하겠다 말하는 셈이다. 즉, 나의 모든 말은 진실이라는 얘기다. 농담이다. (진짜다.)
하지만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김없이 봄이 찾아온 것. 여느 때처럼 정신없이 학교에 갔다. 운동한답시고 계단을 이용했지만, 미처 흐를 땀은 계산하지 못했다. 땀을 훔치니 살짝 발랐던 선크림이 손에 묻어났다. 제기랄. 애써 바른 선크림을 꼼꼼히 닦아내며 문을 열었다. 살랑살랑. 미세먼지와 함께 봄을 품은 바람이 불었다. 눈앞에 펼쳐진 등굣길엔 언제 폈는지 모를 개나리가 노랬다. 길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봄이, 길 위에서 멀찌감치 환했다.
언제고 맹렬할 것만 같던 추위가 사그라지고, 어김없이 봄이, 그리고 (망할 놈의) 황사가 찾아왔듯, 4월에도 어김없이 여러 편의 기대작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 결국, 나와 영화는 서로 같은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누가 더 설레는지 가늠하긴 어렵다. 하지만 나도 영화 못지않으리라. 확실한 것은 둘은 수렴할 거라는 것. 들뢰즈의 말을 좀 바꿔서 ‘나는 영화가 될 것’인가?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어쨌든, 3월의 기대작(‘지극히 주관적인 3월 개봉 영화 기대작 다섯 편’)에는 공교롭게도 한국 영화가 한 편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국 영화 한 편에 특히 눈길이 간다.
<화장>(임권택), <모스트 바이어런트>(J.C. 챈더) , <화이트 갓>(코르넬 문드럭초), <질투>(필립 가렐). 글에서 다루진 않지만, 반가운 재개봉 소식이 있어 전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세르지오 레오네, 1984)와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 1940),
<화장> (4월 9일 개봉) – 102, 김훈, 그리고 임권택
102. 버스 번호나 아파트 동 숫자가 아니다. 이번에 개봉하는 <화장>까지 포함해서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의 총 편수다. 상상이 되는가? 내가 기억하기엔, 임권택은 106편을 감독한 김수용 감독 이후 한국영화사상 두 번째로 많은 작품을 남긴 감독이다. 조만간 그 기록도 갱신되리라 믿는다. 네 편만 더 찍으면 동률이고 다섯 편이면 동률이다. 다섯 편!
102편의 영화를 나열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 많은 수의 영화를 감독했다니. 102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임권택이 한국 영화의 산증인이자, 큰 버팀목임을 방증한다. 혹자는 ‘다작이 대수랴?’는 생각을 품을지 모르겠다. 영화를 공장에서 찍어내듯 가볍게 만들던 시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수용 감독은 60년대에만 64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하지만 문제는 감독 개개인이 아니라 당시 영화산업에 있었다. 더구나 임권택의 작품들은 양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뛰어난 성취를 이뤄냈다. 어디까지나 참고자료 정도지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총 7편이 올랐다. 이름을 올린 감독 중 가장 많은 편수다.
물론 단지 102번째 영화라서 <화장>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화장>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김훈의 단편이다. 김훈이 누군가. 비록 자기는 부정하지만, ‘문장가’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 명확하고도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소설가 아닌가. 김훈의 문장은 대체로 짧지만, 꼭 그만큼의 길이에 육중한 무게를 압축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는 문장이 없다. 활자 속에서 번뜩거리는 강렬한 문장들이 영상 속에서는 발할 길이 없다. 내러티브가 있지만, 그 모든 문장들을 내러티브로 옮긴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이는 단지 김훈의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강남 1970>을 찍은 유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영화화하기 위해 묘사 등 서술 부분을 다 빼고 상황이나 대화만 추려보면 늘 몇 줄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소설과 영화 사이는 멀다.
하지만 문제는 ‘소설을 충실히 재현해내지 못할’ <화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차라리 소설에 함몰되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화장>이 문제다. 영화 본연의 위치를 망각하고 소설과 영화 그 중간에서 어중간하게 위치한다면, 그건 큰 문제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이러한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는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설의) 그 문장이, 그런 점에서도 대단히 힘이 있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걸 뒤따라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하긴. 임권택이 누군가. 한국 영화계의 거장 아닌가. 앞선 걱정은 기우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계의 두 거장이 만난 자리. 거기서 한 쪽이 다른 한쪽으로 휩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 어리석은 걱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김훈의 문장을 철저하게 거스른 영화 <화장>, 임권택만의 영상으로 재탄생할 <화장>이 기대되는 이유다.
<모스트 바이어런트> (4월 2일 개봉) – J.C. 챈더? 오스카 아이삭!
J.C. 챈더의 전작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모스트 바이어런트>에 대해 기대를 걸 만한 까닭은 없다. 솔직히 영화제에서 꽤 주목받는 감독이라는 그의 경력이 나의 기대를 높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로지 그뿐만은 아니다. 영화제의 시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이며, 절대 객관적이거나 순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니까.
챈더는 15년간 광고를 제작한 이력이 있다. 광고 감독에서 인정을 받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해도, 15년이라는 세월은 적지 않다. 그만큼 챈더는 광고라는 장르에서 잔뼈가 굵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광고에서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반면에 <마진 콜 : 24시간, 조작된 진실>(2011)로 데뷔한 이후(단편 제외),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기간은 5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 외에 내가 <모스트 바이어런트>에 기대를 거는 진짜 이유는 챈더의 15년이라는 광고 제작 경력에 있다고 해야겠다. 광고는 창의적이고 새로우면서도 찰나의 순간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장르다. 그렇다면, 챈더의 전작들에 붙여진 찬사 중 “새롭다.” 혹은 “독특하다.”라는 특성은 광고경력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광고는 광고고 영화는 영화이므로, 광고적인 특성을 영화에 도입했다는 점‘뿐’이라면 실망할 공산이 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압도적으로 긴 기간 동안 몸담았던 광고계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영화화된 광고를 찍었을 수도. 기대와 동시에 우려가 앞서는 이유다.
거기다 오스카 아이삭이 이번엔 어떤 식으로 연기를 펼칠지도 관건이다. <아고라>(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9)의 오레스테스, <로빈 후드>(리들리 스콧, 2010)의 존에서 <인사이드 르윈>(코엔 형제, 2013)의 르윈 데이비스, 거기다 <엑스 마키나>(알렉스 가랜드, 2015)의 네이든까지. 이 모든 역할들을 한 인물이 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질 않는다. 이 모든 인물들에서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뽑아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말은 곧, 그만큼 오스카 아이삭의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는 의미이자, <모스트 바이어런트>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의 작품이면 무엇이든지 매번 기대하게 될 것만 같다는 고백이다.
<화이트 갓> (4월 2일 개봉) – 어디까지나 판타지
<화이트 갓>의 내용은 간단하다. 사람들한테 버림받고, 괴롭힘 당하던 개들이 역습을 시작한다. 예고편만 봤을 땐, 마치 흔한 인공지능로봇 영화가 떠올랐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결국 인간과 대적하게 되는 로봇의 이야기. 다른 점은 로봇이 아니라 개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좀 더 못되고 흉악하게 묘사된다는 점이지 싶다.
로봇 이야기가 (어느 정도) SF라면, <화이트 갓>은 판타지다. 전자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 위에서 진행된다. 개들이 집단적으로 인간에게 반격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이성적이지 않은 바보거나, 이성적인 바보. 어쨌든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타지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현실적인 가치 판단의 연장선상 위에 놓으면 곤란하다.
굳이 판타지라는 점을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것은 혹시 이 영화가 ‘개에 대한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오인할 사람들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애견인’들을 위한 헌사쯤으로 알고 영화를 볼 사람들을 있다면 만류하고 싶어서다. 글쎄,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가 정말로 동물을 사랑할 수도, 애견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이 곧 영화는 아니다. 또한, 만약 그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용도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찍지 않았을까. 최소한,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할 까닭은 없었다. 예컨대, 다소 극사실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수취인불명>(김기덕, 2001)에 나무에 개를 매달아 쥐 잡듯 패는 씬이 있다. 영화의 지극히 일부임에도 그 씬의 잔혹함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게 남았다.
풍자의 일환으로 판타지를 도입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풍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풍자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풍자의 형식이다. 얼마나 세련되게 대상을 에두르는가. 만약 <화이트 갓>이 ‘개를 사랑하자!’라는 구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러한 구호가 영화의 전부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전적으로 판타지라는 형식에 집중해서 볼 예정이다. 오해하진 마시길! 나도 나름 애견인이니까.
<질투> (4월 9일 개봉) – 한 번으론 부족해
추상적인 단어 하나가 제목의 전부다. 질투. <질투>는, 그러므로 질투라는 감정을 다루는 셈이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영화에서 표현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리라. 이는 위에서 살핀 <화장>의 문제의식과 다르지 않다.
소설 등의 활자 매체와 달리 영화에서 설명은 최소화된다. 단지 쇼트에서의 인물의 표정, 제스처, 그리고 컷과 쇼트의 함축적인 연결, 미장센 등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인물들 간의 대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에두를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몇 장에 걸쳐 서술할 수 있었지만, 영화에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마치 활자화된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다니엘 위예와 장-마리 스트로브의 영화 같은 예외도 있다.) 대화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이고 일상적이다.
그만큼 추상적인 감정을 담은 영화는 미묘하며, 또한 미묘하게 읽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짐작건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직설적인 메시지가 하나도 없는 이상, 그 모든 것들은 은유다. 즉 영화의 세부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메시지다. 아마 <질투>는 최소 두 번 이상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