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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직지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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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직지인심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10/16 09:32 수정 2017.10.18 09:06
▲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 칼럼니스트

직지인심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리를 캐거나 계행(戒行)을 닦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알게 하여 불과(佛果)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선종(禪宗)의 2대조 혜가(慧可)와 달마(達磨) 조사와의 문답에서 유래한 이 말은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어 교리를 공부하거나 계행을 떠나서 직접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혜가가 달마에게 불도(佛道)를 얻는 법을 묻자 달마는 한 마디로 마음을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이지요.

중생들은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인이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한다면 많은 세월을 수행으로 보내고, 애써 경전을 쓰며, 끼니를 잊고 경을 외우더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곧바로 알면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므로 성불(成佛)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쉬운 일이 아닌가요?

불교는 전통적으로 경(經) · 율(律) · 론(論)의 삼장(三藏)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전승해왔습니다. 하지만, 선종은 경전 적 가르침에 의거하지 않고 불교의 핵심인 마음을 곧장 가리켜 성불하는 가르침을 표방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킨다는 뜻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이지요. 그러므로 직지인심은 선종을 여타의 불교 종파와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직지인심은 견성성불(見性成佛), 돈오(頓悟) 등의 용어와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경전의 매개 없이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므로,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의 본성(本性)을 보고 단박에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문제입니다.

부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 교종(敎宗)입니다. 그런데 선종은 부처의 마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지요. 선종은 연꽃을 내 보인 부처의 뜻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아내고 슬며시 웃었다는 가섭(迦葉)의 염화미소(拈華微笑)를 그 뿌리로 합니다. 그러므로 선종은 단번에 깨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세 심 불가득(三世心不可得)’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 638~713) 이후 중국의 남쪽에선 선풍이 크게 일었습니다. 그러나 북쪽은 여전히 교학이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금강경에 아주 능통한 북쪽의 덕산 선감(德山宣鑑 : 782~865) 스님이 하루는 ‘남쪽에선 직지인심견성성불이요 불립문자라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경(經)에 매달려온 덕산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이며 문자를 세우지 않고 성불한다.’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덕산은 ‘남쪽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멸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리고 손수 쓴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바랑에 짊어지고 남쪽을 향하여 장도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예주 땅에 당도한 덕산은 우선 어느 떡집에 들어가서 시장기를 면할 떡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떡집 노파는 무슨 까닭인지 떡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스님 바랑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덕산이 “금강경소초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노파가 다시 묻습니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하시려오?” 뜻밖의 이 물음에 덕산 스님의 입은 꽉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노파에게 참패를 당한 덕산은 ‘일개 떡집 할머니가 이 정도라면 근처에 훌륭한 선지식(善知識)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덕산이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처에 어떤 선지식이 계십니까?” “오 리 밖에 용담 숭신(龍潭崇信 : 782~865) 스님이 계십니다.” 덕산은 곧바로 용담 스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용담 스님을 만나게 된 덕산은 교학자이니만큼 온갖 이론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깊었습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용담 스님이 “밤이 깊었으니 이제 그만 객사에 가서 주무시지요.” 그런데 인사를 하고 나가 객사를 찾던 덕산이 다시 돌아와 “사방이 캄캄하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지촉(紙燭)에 불을 붙여주고 덕산이 받으려고 할 찰나에 이를 훅 불어 꺼버렸습니다.

이 순간 덕산 스님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온갖 이론을 다 안다 해도 허공에 털끝 하나 놓은 것만 같지 못하고, 바다에 물 한 방울 던진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외치며 ‘금강경소초’를 불사르고 용담 스님을 하직했습니다.

그럼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이란 특별히 신비한 무엇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삼학수행(三學修行)’을 하면 누구나 쉽게 진리를 깨칠 수 있습니다.

삼학이란 정신수양(精神修養) ‧ 사리연구(事理硏究) ‧ 작업취사(作業取捨)를 말합니다. 정신수양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면 정신이 철석 같이 견고하여, 천만경계를 응용할 때에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겨 결국 수양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사리연구공부를 오래오래 공부하면, 천만 사리를 연구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이 생겨 결국 연구력을 얻게 됩니다. 또한 작업취사공부를 오래 오래 계속하면, 모든 일을 응용할 때에 정의는 용기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실행의 힘을 얻어 결국 취사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깨치면 부처이고 못 깨치면 중생입니다. 우리 이런 직지인심 하는 삼학수행으로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쳐 불보살의 위에 우뚝 서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0월 1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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