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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계 별책', 박물관서 찾았다....
사회

이순신 '장계 별책', 박물관서 찾았다..

심종완 기자 입력 2015/04/06 17:02



일제 강점기 이후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무공 이순신 관련 유물 중 하나의 소재가 최근 확인됐다.

[연합통신넷= 심종완기자] 난중일기 교감완역본을 펴낸 이순신 전문가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된 ‘충민공계초’(忠愍公啓草)를 분석한 결과 그간 분실 상태로 알려진 ‘장계(狀啓) 별책’이 바로 충민공계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장계 별책은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임진장초(壬辰狀草)와 별개로 덕수이씨 충무공 종가에 전해지던 또 다른 장계 초본이다. 이순신 사후인 1662년 만든 필사본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올린 보고서 68편을 수록했다.

별책에 실린 기록은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과 함께 포함돼 내용 자체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본은 충무공 종가에서 보관하다 1920년대 일제가 이순신 관련 유물을 조사한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노 소장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발간한 ‘조선사료총간’에 따르면 일제는 1927년 조선 초·중기 역사를 편수하고 이듬해인 1928년 2월 이순신에 관한 문서와 유물 일체의 촬영을 마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충민공계초를 분석하던 도중 1928년 일제가 장계 별책 일부를 촬영한 원판 사진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존재함을 확인하고 충민공계초 실물 내용과 국편 소장 사진을 대조, 둘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28년 당시 별책 소장자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에 살던 이순신의 13대 종손 이종옥(李種玉)씨로 확인됐다고 노 소장은 전했다.

노 소장은 “1959년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서간첩이 국보로 일괄 지정될 당시 장계 별책이 빠졌으니 당시 별책은 이미 충무공 종가에 없었을 것”이라며 “일제가 필름으로 촬영한 1928년 이후부터 1959년 사이 없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충민공계초 첫장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이순신 삼가 올림. 임진년’(全羅左道水軍節度使臣 李舜臣謹 壬辰年)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년) 4월15일부터 1594년(선조 27년) 4월20일까지 선조와 세자 광해군에게 올린 전쟁 상황보고다.

부록으로 임진왜란 중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항복이 이순신에 관해 쓴 ‘이통제비명’(李統制碑銘)과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 동시대 문신 박승종의 글 ‘충민사기’(忠愍祠記)가 함께 실렸다.

노 소장에 따르면 충민공계초라는 제목은 1601년(선조 34년) 전남 여수에 세워진 사당 충민사(忠愍祠)에서 따 왔다. 여수는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전라좌수영의 당시 소재지다. 선조는 이항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곳에 이순신을 추모하는 사당을 짓도록 하고 충민사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내렸다.

장계 별책 외에 난중일기 초고본 중 을미년(1595년) 일기, 이순신이 생전 사용하던 쌍룡검, 해남 충무사에서 도난당한 이순신 영정,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보낸 문건인 감결(甘結), 이순신을 사후 우의정으로 봉한 선조의 교서 등 이순신 관련 유물 5종이 현재 분실된 상태다.

충무공 종가의 한 관계자는 “집안에 전해져 내려왔다는 유물이 일제 강점기에 없어져 필름으로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후손으로서 매우 안타까웠다”며 “이제라도 존재를 확인하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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