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부활의 계절 4월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세월호 이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죽음과 부활을 논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했다. 올해 초, 한국교회에 대한 어느 신학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의 교회는 영적 치매 상태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다 잊어버렸다. 영적 자폐다. 자기들 속에만 갇혀 버렸다. 영적 방종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있다. 한마디로라면 영적 파산이다. 과장일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백해무익한 시대가 됐다." 건강한 작은 교회 운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건작연은 건강한 작은 교회 태동과 확산을 위해 2005년 설립한 단체다. 너머서교회(이헌주 목사), 새맘교회, 예인교회(정성규·안태훈·이정한 목사), 언덕교회(박창훈·최종원·김태완 목사) 등 아홉 교회와 교회개혁실천연대(박득훈·박종운·방인성·백종국·윤경아 공동대표)가 속해 있다.
이들은 △민주적 교회 운영과 투명한 재정 △작고 낮아짐을 지향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 △개교회주의를 벗어난 건강한 작은 교회 연합 등을 공동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부패한 한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를 공론화하고, 건강하고 민주적인 교회 구조를 만들기 위한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교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치적 동원, 약자 소외, 대형화의 세 가지로 나눠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현주목사는 자유함과 유쾌함 조용함을 배우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돈의 신을 숭배해온 죄를 회개하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프리존은 대형교회의 세습문제로부터 자유로운 풍요를 갖고있는 한 목사와 만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명성교회 측에서는 왜 남의 교회 일에 간섭하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명성교회는 예장통합과 한국교회, 세상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나. 영향력을 발휘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간섭하지 말라 한다. 이해가 안 된다. 명성교회는 특정인이나, 교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국내·세계·특수 선교 사역에 동역하는 모든 이의 것이다. 하나님나라로 인도될 모든 이의 것이다. 피조물 전체의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화하여 개교회 것으로 만들려 하는가. 추진하는 세습은 관련된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할 뿐이다. 간절히 요청드린다. 세습 시도를 멈춰 달라."
정치에 동원된 교회 신도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한 대형 교회 부목사의 주도로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지지 댓글이 조직적으로 게재되는 이른바 ‘십자군 알바단’ 사건이 있었다. 더불어 올해 초까지 계속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엔 일부 교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일부 교회는 불법 선거운동이나 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노골적인 정치적 보수화는 일부에게만 해당하는가?
모든 교회의 문제가 아닌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 내부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김동춘 교수의 저서인 『대한민국은 왜?』에서는 한국 사회의 보수 주류의 핵심으로 월남 기독교 세력을 지목하고 있다.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공산당 세력에게 땅을 뺏기고 핍박을 당해 분단을 전후로 남쪽으로 피난 온 분들이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한국 교회에도 강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들은 대개 친미, 친자본, 반공의 흐름과 함께 했으며 독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묵인해왔다.
월남 기독교 세력이 왜 친미, 친자본, 반공의 흐름과 함께 하게 된 것인가?
우연적인 사건이 중첩된 결과다. 우선 북한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사실상 쫓겨 온 이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산당세력에 의해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 초기 선교사들 중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와 친화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남한 쪽에 선 유엔군의 주축은 바로 미군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우연들이 겹치면서 기독교인은 친미, 친자본, 반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는 북한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원한과 미국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다. 감정의 골이 깊어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이 어렵다.
불법 선거운동이나 탄핵 반대 집회에 교인이 동원됐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회가 불법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국정원과의 연관성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교회가 크게 사과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광장에 나가 주요 정치현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는 것이다. 탄핵 반대가 과연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정의와 맞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사로운 개인과 함께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위해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대통령의 탄핵 반대에 교회가 앞장섰다는 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정신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라는 권력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짓밟는 것을 참지 못하고 모세를 통해 해방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우리가 어떻게 부패한 권력자를 옹호하고 감싸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약자를 등진 교회, 외면받는 성소수자와 여성
일부 교회에서 성소수자의 입회와 여성 목사의 임명이 금지되는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행해지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통합, 고신 등을 포함한 개신교 8대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가 나서 그간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오던 임보라 목사에 대해 이단성이 크다고 판단한 일도 있었다.
일부 교회의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입장이 궁금하다.
66권에 달하는 방대한 성경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6군데 정도 된다. 창세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몸을 이뤄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 일부 교회는 이에 근거해 동성애는 성경적 원리에 어긋난다고 말한다.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성경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파면시켰던 중세교회의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종교개혁도 성경에 대한 재해석에서 비롯됐다. 동성애 문제에 관해 성경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지난 9월 총회에서 일부 교단은 동성애자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게 했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교회 직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징계하기로 했다. 이런 배제의 신학과 공포정치는 교회가 예수님 당시처럼 심각하게 병들어있다는 증거다.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정죄된 동성애가 오늘날의 동성애와는 다르다고 판단한다. 성경에서 언급된 동성애는 변태성욕, 성에 대한 왜곡, 천박한 종교의 타락한 행위에 해당하므로, 성경이 동성 간의 진실한 사랑까지 비난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이성 간의 가장 온전한 형태의 사랑과 동성 간의 가장 타락한 형태의 사랑을 상정해 일반화시켜 비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동성 간에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성 간에도 성적인 타락이 있을 수 있다.
더불어 아이를 낳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혼을 통한 인격적인 결합과 연대에 있어 이성이든 동성이든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성간의 결혼에도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가지지 않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아내의 완경(完經) 이후엔 성적 결합이 임신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임신가능여부는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별하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없다. 또한 성경이 쓰일 당시 이성애가 하나의 규범이었기에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없을 뿐이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동성애와 동성혼을 근본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부 교회에서 여성 목사의 임명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 등의 구절이 성경에 있다. 이를 문자 그대로 수용해 여성 목사의 임명을 금지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 성경전체의 흐름을 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성을 존중하며 인격적인 주체로 대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때 끝까지 곁을 지킨 이들과 부활의 첫 증인들도 바로 여성이다. 더불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여성과 남성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다.
몸집과 함께 커진 폐단,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목사 우상화나 교회 세습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 최근에는 교회 재정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중첩되고 있다. 2014년에는 한 대형 교회에서 800억 원 규모의 적립금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라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불어 정부가 2018년부터 종교인 과세를 시행하겠다고 하자 일부 교회에서 반발이 이어졌고 이에 대형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은 더욱 거세진 상황이다. 대형 교회의 폐단이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득훈 공동대표는 작은 교회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민중신학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나.
민중신학은 예수, 하나님이 아닌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민중의 수난에서 예수의 수난을 읽어 내는 거다. 민중 속에서 예수를 보는 거다. 민중 메시아론이자, 민중 구원론이다. 민중은 사람의 구원을 담보한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
나는 이제 와서 민중 개념을 달리 읽는다.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송 교수는 이를 하나님나라라고 불렀다 – 기자 주)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인간화 신학'에서 민중을 단순히 '소외 계층, 피억압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을 민중(다중)으로 보게 됐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가 민중인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 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민중'이다. 지금은 '다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다.
교회가 대형화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는가?
교회가 대형화되면 많은 사람과 돈이 모이고 자연스럽게 그 돈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권력이 생긴다. 권력이 생기면 교회의 부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목자는 양 99마리를 놔두고 잃은 양 1마리를 찾으러 나가야 한다. 잃은 양 1마리를 계산 없이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대형 교회가 되면 남아있는 양 99마리가 중요해진다. 잃은 양 1마리를 찾아 헤맬 시간이 없다. 교회를 키우기 위해 돈이 많고 잘나가는 강자와 친해져야 하고, 따라서 약자를 무시해 타락할 수밖에 없다. 목사 우상화나 교회 세습 문제 또한 대형 교회에서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대형 교회는 목사가 꽉 쥐고 있지 않으면 운영이 어렵고, 권력을 가진 목사는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교회를 물려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교회가 커야만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반박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훨씬 어려울 뿐이지 작은 교회도 연대해 큰일을 이뤄낼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대형 교회의 돈과 권력으로 하겠다는 사고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 하나님의 일은 세속적 힘이 아닌 자기 비움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 과세를 둘러싸고 소득세법의 기준에 대한 논란도 거세다.
대형 교회 대부분은 종교인 과세 실행보다는 그동안 행해왔던 것처럼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자발적 납세와 소득세법에 따른 납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새로 시행될 소득세법에 따르면 학자금, 식사비, 실비변상적 성질의 급여 등은 목사의 소득으로 분류되지 않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예컨대 만약 목사가 일정액의 도서비를 교회(법인)카드로 지출하거나, 지출 후 영수증을 제출해 돌려받으면 실비변상적 성질의 급여에 해당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일정액을 받아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면 소득세 과세 대상이 된다. 문제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의 경우 이런저런 명목으로 교회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아 자기가 알아서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데 있다. 이런 돈의 존재를 밝혀 추가적인 소득세 납부를 피하고 싶으니 일부 교회 목사들이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이고 작은 교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성경에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구절이 있다. 많은 한국 교회들이 지금 실제로는 눈이 멀었지만 그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안톤의 실명증세’에 빠져있다. 사회는 교회가 부패한 걸 다 알아버렸는데, 막상 교회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일단 눈을 떠야 한다.
더불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했다. 소금은 세상 속에 스며들어야만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빛은 세상의 어둠에 강력히 저항해 물리치는 역할을 상징한다. 대형 교회는 이런 정체성을 지킬 수 없다. 교회 안에 쌓여 있는 돈과 권력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작아야 이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과 하나 돼 자신을 던질 수 있다. 작아야 사회적 약자를 중심에 두고 정의, 평화, 생명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교회는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 목회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 이라며,.
한여름 ‘잔잔한 가르침’에 젖어들고 싶다면….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양현혜·이대출판문화원)= 일본 무교회주의 운동 대표인 우치무라 간조의 평전이다. 한국에서도 제도권 교회에 실망이 큰데, 그의 삶을 통해 성도 개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함석헌, 김교신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의 무교회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옥중서신>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디트리히 본회퍼·복있는 사람)= 20세기 대표 신학자이자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알려진 그의 여러 저서 중 대표적으로 많이 읽히는 3권을 선정한 세트다. 예전에 나온 한문 투 번역과 달리 최근 번역본이라 쉽게 읽을 수 있다. 경건, 실천, 교회론 등 여러 측면에서 주는 통찰이 큰 저자로, 언제든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김근주·성서유니온)=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보면 좋을, 밀도 있고 재미있는 책이다. 구약학 교수인 저자는 기독교인이 자주 간과하고 오해하고 왜곡하는 습관을 잘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 접근하는 데 진입 장벽을 느끼는 이들에게도 성경 해석의 관점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