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서현주 씨(34·여)는 얼마 전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 강남역 사거리를 찾았다. 약속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온 서 씨는 '유니클로'에 들러 새로 나온 청바지를 샀다. 그러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생활용품 매장인 '무인양품'에서 수건과 슬리퍼를 고르며 시간을 때웠다.
약속시간이 되자 서 씨는 친구들과 함께 카레 전문점인 '코코이찌방야'에 가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한 친구의 얘기에 근처에 있는 꼬치구이 전문 주점 '와타미(和民)'로 향했다.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일본 꼬치구이 전문점 '와타미'에서 손님들이 식사와 음주를 하고 있다. 초저녁인데도 식당 내부엔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최근 강남역 주변에는 일본 브랜드나 일본풍을 지향하는 가게들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이날 서 씨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곳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메이드 인 저팬', 즉 일본 브랜드라는 점이다. 서 씨는 음식을 소재로 한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본 것을 계기로 친구들과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음식점이나 술집을 자주 방문한다고 했다. "일본풍의 식당이나 술집에 가면 이국적이며 새로운 느낌이 들고, 특히 강남역 사거리에는 그런 가게가 몰려 있어 종종 찾는다"는 설명이었다.
'제2의 도쿄' 된 강남역 거리
강남역 상권은 서울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에서 강남역(지하철 2호선, 신분당선) 사이의 상가 밀집지역을 뜻한다. 상권 가운데를 관통하는 강남대로는 서초구와 강남구의 경계 역할을 한다. 강남역 인근의 '뉴욕제과'와 '타워레코드' 같은 곳은 서울 강남을 대표하는 약속 장소로 유명했다. 강남역 주변은 지금도 클럽 등의 유흥가와 학원가가 공존하는 독특한 성격의 번화가로 꼽힌다. 강남역은 서울 지하철 1∼9호선 중 가장 인파가 붐비는 역으로 하루 평균 이용객이 13만5600명에 이른다.
이런 강남역 주변 거리가 요즘 '제2의 도쿄'로 불리고 있다. 일본 스타일의 주점과 식당, 생활용품 전문점 등이 속속 들어선 것이 그 이유다. 하루 약 100만 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강남대로에서는 '무인양품'과 '유니클로', 'ABC마트' 등 일본 브랜드의 가두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뒷골목은 일본 스타일의 음식점과 주점들 차지다. 이자카야(일본식 술집)와 일본식 라멘(라면)집, 일본식 카레 전문점 등 크고 작은 일본 스타일 점포가 즐비하다.
동아일보가 최근 강남역 주변 상권을 조사해본 결과 이곳에서 영업 중인 일본풍 점포나 일본 브랜드 매장이 5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역 맛의 거리' 상인회의 권정현 총무(42)는 "전체 점포의 20∼30% 가까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엔 사케나 일본 맥주 전문집 등을 중심으로 일본풍 매장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같이 일본 스타일이 유행하자 일본 기업들 사이에는 강남역 일대를 한국 진출의 '연착륙 지점'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실제로 일본 햄버거 브랜드 '모스버거'와 꼬치구이 전문 술집 '와타미', 제조유통일괄형(SPA) 의류 및 생활용품 브랜드 '니코앤드'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1호점을 낸 곳이 모두 강남역 주변이다. '니코앤드'를 운영하는 아다스트리아코리아의 다카키 가쓰(高木克) 대표는 "강남역을 찾는 젊은 소비자들은 일본을 포함한 해외 브랜드를 적극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이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유통 브랜드들이 하나둘 한국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일본 상품을 팔지 않거나 일본인 손님이 거의 없는 강남역 일대 가게들도 일본 스타일을 차용하고 있다. '주변 분위기가 그래서…'란 군색한 변명과 함께. 파전과 막걸리를 팔면서 메뉴를 일본어로 적어 놓은 한국식 주점이나 '내과'를 '나이카(ないか·內科)'로 표기한 병원도 나타나고 있다.
강남역 주변에서는 간판이나 메뉴를 일본어로 표기한 가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친숙하면서도 이국적인 문화 즐기려는 3040세대 몰려
강남역 일대는 1990년대 이후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로 떠올라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조두희 ㈜GNS와타미F&B서비스('와타미' 운영) 대표는 "학생 등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몰리는 강남역 거리는 서울에서 소비자들의 유행을 가장 빨리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며 "일본 스타일의 가게들에 손님들이 몰리는 것도 일종의 유행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일본풍을 주도하는 계층이 30, 40대 직장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1990년대부터 강남역을 즐겨 찾았던 X세대이면서 지금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세대, 즉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컨설팅회사 액센츄어의 손건일 전무는 "일본 특유의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콘텐츠와 '고급' 이미지를 앞세운 점포들이 주머니가 두둑한 X세대를 파고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남역 인근의 일본풍 식당이나 주점의 경우 음식과 술값이 다소 비싼 편이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20대는 다소 부담을 느끼는 편이다.
예전보다 술을 적게 마시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일본식 식당·주점이 인기라는 해석도 있다. 권 총무는 "회식을 하더라도 예전처럼 룸살롱이나 호프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게 아니라 '간단하고 깔끔하게' 한잔하는 모임이 늘고 있다"며 "이런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이자카야 등 일본풍 주점을 즐겨 찾는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덕에 요즘에는 강남역과 관련된 대표적인 연관 검색어로 '맛집'이 떠올랐다. SK플래닛이 소셜 분석 시스템인 'BINS 2.0'을 통해 최근 두 달간(1월 20일∼3월 29일) 생성된 강남역과 관련된 온라인상의 키워드 3만8896건을 분석한 결과 위치(강남, 출구, 서울 등)를 나타내는 단어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가 바로 맛집(3729건)이었다.
한편 일본풍 유행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상품을 판매하지 않는 곳에서도 일본어 간판을 내걸다 보니 강남역 주변이 '국적 불명의 거리'가 돼 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남역 인근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일본 스타일을 표방한 상점들이 인기를 얻다 보니 (한국임에도) 오히려 한국식 분위기의 점포들이 하나둘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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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74% "별 느낌 없어"
50대 54% "거부감 든다"
'일본 스타일'이 유행하는 강남역 풍경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동아일보와 시장조사 전문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은 조사 프로그램인 '서베이 24'를 통해 1일 설문조사를 해봤다. 최근 1년 동안 강남역에 가본 적이 있는 20∼50대 시민 400명(연령대별로 100명씩)이 대상이었다. 그 결과 10명 중 7명 이상(72.9%)이 강남역에 갔을 때 일본 스타일의 음식점이나 일본 브랜드 매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한 달에 한 번 이상 간다'는 응답이 전체의 24.5%로 가장 높았다.
일본풍의 가게나 일본 브랜드 매장을 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응답이 31.3%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정갈함이나 소박함 등 일본 특유의 스타일을 느끼기 위해'(28.5%)와 '국내 점포에서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것에 끌린다'(22%)는 응답을 합치면 응답률이 50%를 넘어섰다. 양요한 마크로밀엠브레인 상무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답한 응답자 중 상당수는 일본풍의 가게에 대한 거부감이 없거나 '국적'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자주 방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강남역 일대 일본 스타일의 가게나 브랜드에서 느끼는 감정은 나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20대는 이런 가게들에 대해 74%가 '별 느낌 없다'는 응답을 했지만 40대 48%, 50대 35% 등 연령대가 높을수록 응답률이 떨어졌다. 반면 '다소 거부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는 응답은 40,50대로 갈수록 높게 나타났다. 특히 50대는 전체의 43%가 '다소 거부감이 든다', 11%는 '왜색이 짙어 불쾌하다'고 답하는 등 강남역 내 일본 스타일의 유행에 대해 비교적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는 일본풍의 가게나 일본 브랜드 매장 방문 횟수에서도 나타났다. '일본풍의 가게를 가 본 적이 없다'는 50대의 응답률은 38%로 전체 평균 응답률(27.1%)을 웃돌았다.
이번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일본 스타일의 유행에 대한 남녀의 시각 차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남역 주변에 일본풍의 가게나 일본 브랜드 매장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남성은 '글로벌 시대 문화의 다양성 차원으로 해석한다'(31.5%) '새로운 문화나 유행이라고 생각해 반감이 없다'(31%) 등 다소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여성은 전체의 41.5%가 '국내 기업이 영향을 받을까 염려된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