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도로 등 사회기반시설
9.6%가 지은 지 30년 이상
안전 관리, 미·일에 4년 뒤져
영화관 데이트를 즐기려던 20대 연인이 대낮에 날벼락을 맞았다. 인도를 걷다 느닷없이 땅이 꺼지는 바람에 3m 아래 땅속으로 굴러떨어져 20분간 갇혔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심리치료까지 받았다. 2월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싱크홀(도로 함몰) 사건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당수의 안전사고는 일정 부분 예고된 인재다. 판교 지하철 환풍구 붕괴사고, 인천 캠핑장 화재사고도 마찬가지다. 자본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안전 투자는 비용일 뿐이다. 이 같은 인식은 언제든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60~1970년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회기반시설이 위험에 노출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봄비가 흩날린 지난 6일 서울 남산1호터널 앞 한남고가도로를 찾았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도로는 멀쩡한 곳이 별로 없다. 임시로 덧댄 아스콘도 다시 벌어졌다. 한남동 방면 하부 쪽 방호벽은 곳곳에 금이 가 있다. 여러 번 보수했지만 콘크리트는 계속 떨어져 나온다. 1991년 완성된 방호벽 상부는 실금이 생긴 정도지만 하부는 염화칼슘, 빗물이 흘러내려 부식이 상당히 진행됐다. 24년 된 한남고가는 서울의 70여개 고가 중 비교적 젊은 축에 든다. 1970년 완성된 서울역고가의 안전등급은 D등급이다.
전국의 도로·교량 같은 사회기반시설 중 30년이 지난 게 9.6%다. 10년 이상 된 건 20%를 넘는다.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필요하지만 정부는 땜질처방에 급급하다.
도로 함몰로 사고가 급증하는 게 단적인 예다. 지난해 여름 함몰사고가 잇따르자 정부는 '민·관합동 특별팀'을 꾸려 현황 파악에 나섰다. 땅속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장비는 일본 업체에서 빌린 지표투과레이더탐사기(GPR)가 유일했다. 이 업체는 5일간 서울 지역 4곳 61.3㎞ 구간에서 41곳의 동공 의심지점을 찾아냈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땅속의 신호를 분석해 어디에 심각한 동공이 있는지 분별하는 게 핵심 기술인데, 인력·장비를 오래 투입해서 노하우를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시설물 안전·유지관리 기술은 미국의 76.2% 수준(국가 R&D 기술산업정보서비스·2010년 기준)이다. 일본(95.9%)은 미국과 비슷하다. 한국은 4.3년 뒤처져 있다.
도로 함몰 중 상당수는 노후관로에서 새는 생활하수가 주된 원인이다. 서울 하수관로 중 30년 넘은 관은 5000㎞다. 50년 이상도 932㎞다. 관로 교체에 드는 비용만 4조원을 웃돈다. 매년 30년을 넘는 관로도 260㎞씩 생긴다. 서울시는 도로·교량 유지관리 예산을 꾸준히 줄이다 사고가 잇달아 터지자 올들어 30% 이상 늘렸다. 노후관 교체에 시비 1840억원을 배정했는데 모자란 1000억원은 국비에서 충당해야 한다. 여기 배정된 정부 예산은 100억원뿐이다.
소규모 시설은 더 위험에 방치돼 있다. 길이 100m 미만 다리나 저수 규모 100만t이 안되는 저수지, 옹벽, 경사가 심한 이면도로는 시 관리대상에서 빠져 있다. 교량은 전국 2만8713개 중 67%(1만9123개)가 사각지대에 있다. 백용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위원은 "옹벽 같은 소규모 시설은 방치되는 게 더 많다"고 말했다.
정부 규제 완화도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 중 하나다. 2009년 국토부가 선령제한을 30년으로 바꾸면서 국내 여객선 중 20년을 넘긴 배는 2008년 12척에서 2013년 69척으로 5배 이상 늘었다. 지하철 노후화도 심각하다. 부산 지하철은 전동차의 15%가 25년을 넘겼다. 서울 지하철 1~4호선 전동차도 24%가 20년을 넘겼다. 철도와 지하철, 부정기 운송용 항공기의 사용기한은 없어진 상태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은 "전동차 사용연한 연장과 노후화에 따른 고장은 사고 유발 원인이 될 수 있어 규제가 필요하다"며 "세월호 참사 원인 중 하나가 무분별한 여객선 선령 연장이 한몫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비용 문제에 대해서는 "교통안전 예산의 경우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 집중돼 있는 교통시설특별회계에 안전투자계정을 두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안전을 위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같은 사회적 담론 없이 안전은 일차적으로 개인 책임이 됐다"며 "세월호 이후 안전관리를 민간에 위탁하겠다는 정부의 정책기조는 오히려 강화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