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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년 상처와 슬픔 故 이근형군 가족의 1년..
기획

세월호 1년 상처와 슬픔 故 이근형군 가족의 1년

심종완, 임병용 기자 입력 2015/04/15 00:35
"형아 언제 와?"

[연합통신넷= 심종완, 임병용기자]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7반 고 이근형군의 남동생 하늘이(가명·5)는 요즘도 아빠, 엄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아빠, 엄마는 1년째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근형이는 하늘이가 태어나자 '너무 좋다'며 동생의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켰다. 커가는 동생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엄마가 "하늘이는 근형이가 키웠다"고 말할 정도다. 학교에서 근형이의 별명은 '동생 바보'였다.





"형아 어디 갔어?"

지난해 5월 어느 날 밤, 하늘이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근형이 방 문을 벌컥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형아는 하늘나라에 갔어." 지난해 4살이던 하늘이는 '하늘나라'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늘이는 그때부터 형아가 언제 오냐고 묻기 시작했다. 요즘은 텅 빈 근형이의 방에서 혼자 놀다가 "형아 보고 싶다"고 혼잣말을 한다.

7일 오후 1시께 찾아간 근형이네 집은 안산 단원구 와동의 한 빌라 2층에 있었다. 주인을 잃은 근형이 방은 치워져 있었다. 하지만 근형이가 사용했던 공책과 볼펜, 기타는 방 한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지난해 12월 근형이 방을 치우면서 이것만큼은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지난해 4월15일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2학년 7반 아이들이 담임인 고 이지혜(당시 31살) 교사와 학교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근형이네 반 33명이 수학여행을 떠났지만, 한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직 근형이의 사망신고를 못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숨진 단원고 학생 246명 가운데 사망신고가 된 경우는 대여섯명뿐이다.

"근형이는 마지막까지도 효자였어요. 그래도 어버이날(5월8일)에 우리 곁에 돌아와 주더라고요."

지난 1년 동안의 삶을 묻자 근형이의 아버지 이필윤(56)씨는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떠올리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도 형 기다리는 5살 하늘이
엄마 아빠는 생업 팽개치고
'특별법·진상규명' 활동에 전념
세월호 외면하는 대통령에
"내가 그런 사람을 찍었다니…"


지난해 4월16일 오전 9시30분 근형이는 어머니에게 갑자기 '사랑합돠'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월호가 50도가량 기울어 있던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일찍도 연락하네'라고 답장을 하자, 근형이는 '무서워요', '배가 기울었어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놀란 어머니가 전화를 하자, 근형이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고 선생님이 옆에 함께 있다"고 말했다. 오전 9시42분 근형이는 엄마에게 '살아서 갈 거에요. 기달려요'라는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팽목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밤새 펑펑 울었어요."

어머니(46)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승용차를 몰고 진도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날 오후 5시 진도체육관에 도착해 구조자 명단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근형이의 이름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조자와 희생자가 처음 도착하는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팽목항에서는 부모들이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날 근형이는 바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먼저 아이의 주검을 찾아 돌아가는 부모는 남아 있는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남아 있는 부모는 아이의 주검을 찾은 부모에게 '다행이다'라고 하는 기가 막히는 현실이었어요."

세월호 참사 뒤 사흘이 지나자 부모들의 희망은 사라졌다. '저게 우리 아이면 어쩌지?', '저게 우리 아이가 아니면 어떡하지?' 진도체육관 스크린에 주검이 수습된 희생자의 옷차림 등이 뜨면 부모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근형이는 5월8일 저녁 8시38분 세월호 4층 선수 중앙 우현의 세번째 방에서 나왔다. 팽목항 선착장에서 하얀 천에 덮인 근형이가 배에서 내려지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슬프다가도 화가 나서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지난해 5월 말 아버지는 근형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출근했다. 아버지는 평생 안산 반월공단의 피혁 공장에서 일했다. 출근하는데 근형이 생각이 났다. 갑자기 눈물이 나더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사표를 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넉달 전 빚을 내어 조그마한 가게를 열었던 어머니도 가게를 정리했다. 매달 200만원이 조금 넘는 긴급생계비와 휴업보상금을 받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지난해 8월부터는 긴급생계비와 휴업보상금이 끊겨 아버지의 실업급여로 살았다. 이달부터 실업급여도 나오지 않아 아버지는 승용차를 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유가족들이 수십억의 돈을 받았다'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과학 선생님이 되겠다던 우리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세 아들 가운데 근형이는 딸 같은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 위에 올라가 장난을 치던 아이였다. 어머니에게는 늘 발을 주물러주며 재롱을 떨었다. 학원도 별로 다니지 않았지만 공부를 잘했다. 특히 과학 과목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집에 있으니까 슬프고 화가 나고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밖으로 나갔죠."

직장을 그만둔 아버지는 지난해 여름부터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에 뛰어들었다. 청와대 근처인 서울 청운동 주민센터와 광화문광장, 국회에서 노숙을 하며 농성을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유가족 간담회에 나갔다. 숨진 단원고 아이들의 생일이 되면 안산 합동분향소와 각 추모공원에서 열리는 생일파티에도 참석했다. 희생된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생일파티는 이틀에 한번꼴로 열렸다. 아버지는 열흘에 한번씩 안산 합동분향소에 나와 밤새 분향소를 지키며 당직을 섰다. 지난 1월26일부터 2월14일까지는 유가족 등과 함께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행진을 했다. 무릎이 좋지 않아 침을 맞으면서도 앞줄에 서서 걸었다. 아버지는 "돌이켜보면 다른 유가족들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을 할 때가 시간이 빨리 갔고 슬픔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과 함께 활동하는 게 나한테는 치유지요."

진상규명 동분서주했지만…한 깊어진 1년
직장 그만두고 진상규명 운동
긴급생계비·휴업보상금도 '뚝'
"다른 유족들과 활동할 때
잠시나마 슬픔 잊었는데…"


도보행진을 마친 아버지는 최근 녹내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나빠지면서 다른 유가족들과 활동을 함께 못했다. 요즘은 가끔 안산 합동분향소에만 나가고 있다. 아버지는 "빨리 나아서 다른 유가족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을 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 너무 답답하다. 건강만 좋아지면 몇십년이 걸리든 우리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가 끝나니까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도 달라질 수가 있나요?"

지난해 10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할 때 아버지는 유가족들과 국회 본관 앞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나타났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우리 애들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시정연설에서도 '세월호'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유가족들을 줄곧 외면했다. 아버지는 이때가 지난 1년 동안 가장 화가 났던 순간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 5월 대국민담화를 발표해 사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유가족과 만나 이야기할 때는 언제고…. 지난 6일 박 대통령이 뜬금없이 세월호 선체 인양을 검토하겠다는 말을 한 것도 4월29일 재보궐선거용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이런 박근혜 대통령을 찍었다니…."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머니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다. 박 대통령은 신중하고 원칙적인 사람인 것 같아 좋았다고 한다.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면 아이를 키우는 데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하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은 세월호 참사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내가 저런 사람을 뽑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머니는 "지난 1년 동안 바뀐 것이 없다. 해경 해체하고 유병언 일가 때려잡은 것 빼고 정부가 한 게 도대체 뭐가 있나. 나는 이제 대통령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 저희 반이 합동분향소 당직이라서 가봐야겠네요."

이날 저녁 7시30분 아버지는 집을 나와 승용차 시동을 걸었다. 승용차 유리창에는 노란 리본이 붙어 있었다. 근형이 집 앞 도로에는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벚꽃이 피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1년이나 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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