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상념에 젖었던 애춘은 욕실에서 서서히 나왔다. 냉장고가 깜박였다. 갈증이 몰려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모두 오랫동안 저장된 것들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음료수들로 가득 찼다. 애춘은 난생 처음으로 냉장고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음식들이 모두 쓰레기장으로 들어갔다. 점점 비어지고 깨끗해지는 냉장고를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고 상쾌해졌다. 그녀는 갑자기 ‘청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채성이 머물고 간 소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회복’이라고 그는 말했다. 부패되고 냄새나는 것들을 지니고 다니기에는 이제 진력이 날 것 같았다. 쓰레기장에 버려져야 할 것들이었다.
‘환락의 파티, 섹스, 명품탐닉, 반복하는 성형. 사치, 권태, 향락, 절망, 허무 모두 버려야 한다.’
이것들은 무덤 주위에서 서성이며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 떼들이었다. 내부를 쪼아대며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 지난날의 삶은 까마귀 떼들을 만족시키는 시간들이었다. 내 영혼을 시체로 노리는 까마귀 떼들을 그동안 나는 얼마나 양육하여 왔는가! 자신의 미련함과 비참함을 실감했다. 이제 무덤가를 맴돌던 무시무시한 이곳을 탈피해야 한다. 지선이 그것을 암시해 준 모델이지 않은가!
채성은 외출 후 돌아와 침실 위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다가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가리켰다. 애춘은 채성이 말한〈회복〉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분노가 들끓었다. 애춘은 갑자기 채성이 누운 침실에 옷을 입지 않은 채 나체로 들어섰다.
“하하하….”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던 채성이 놀라 일어나 앉았다.
“아니…, 다… 당신… 미….”
“왜 미친년이잖아, 나 장애춘은 이렇게 몰락하고 있다. 어때? 황혜란의 나체와 비교되더냐? 이 나쁜 자식아! 난 이렇게 망가졌어!”
불빛에 보이는 그녀의 나체는 여기저기 난도질한 피 구멍이 난 듯 소름이 끼쳤다.
“왜 이래? 정신 차려!”
“처절하게 난 이렇게 망가졌어. 다 너 때문이야….”
“이봐 정신 차려… 애춘….”
그는 애춘을 붙들고 흔들었다.
“아, 아. 어지러워… 여기가 어디지?”
“앗!”
애춘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졸도해버렸다.
채성은 곧 병원으로 애춘을 옮겼다. 곁에서 남편의 보호자로 지켜주어야만 했다. 옆의 간호원이〈과민성 신경장애〉라고도 하고 우울증이라고도 했다. 링게르 주사의 포도당이 한 방울씩 떨어져 애춘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채성은 곁에서 죽은 듯 아무 말 없는 애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부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그녀를 증오하고 혐오하면서도 거절하고 피할 수 없는 연민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병원 뜰에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애춘이 깨어나서 만약 정상적인 부부로 회복만 된다면…!’
그렇게 다시 산다면 자신이 과연 행복할 것인가 고민했다. 어제 그녀가 채성의 방을 나체로 뛰어든 밤, 정말 그녀의 육체는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온몸이 마르고 유방은 처지고 늙은 창녀의 나체와 같았다. 애춘은 늙고 추하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부에 전에 없었던 새로운 면이 보였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진지하고 성숙해져 있는 듯한 그 무엇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이데아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분위기였다.
‘육체는 비록 망가졌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어른스러워졌어!’
육체는 멀쩡하지만 지난날의 그 내용 없는 애춘의 모습보다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내용 있는 인간이란 말인가! 채성은 자신의 염치없고 뻔뻔한 속성을 보면서 인간의 환멸을 느꼈다. 그는 쌀쌀함을 느끼며 호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애춘은 눈을 떴다.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절대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애춘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렴풋이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창밖을 내다보니 채성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 나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그는 분명히 달아날 거야!’
“남편께서는 아주 자상하신데 왜 그렇게 우울하게 사세요!”
간호원이 생수를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네? 자상하다고요?”
“그럼요. 날을 새면서 곁에서 지켜주시더군요.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
“땀을 많이 흘렸는데 손수건을 손수 빨아서 이마에 얹어 주시기도 하고….”
“남편, 아니에요!”
“아내라고 하던데요?”
“………?”
“그럼 부부 사이가 아니었나요?”
“……….”
잠시 후 채성이 들어왔다. 간호원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갔다. 애춘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채성이 애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마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애춘은 채성의 체온을 느끼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