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둘째 딸 아이가 유치원생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손주 녀석이 얼마 전 태권도 도장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애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애는 언제 나가 놀게 해?” “아버지도 참, 나가서 놀 애들이 있어야 밖에 나가게 하죠.”
아 참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를 영어학원이다 뭐다 하고 뺑뺑이를 돌리기만 하니 걱정입니다. 뛰어 노는 아이들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그만한 나이 때는 저녁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동무들과 뛰어 놀았는데 말입니다.
21세기 한국의 자녀 교육에서의 화두(話頭)는 사교육, 기러기 아빠, 선행학습, 조기교육으로 대변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고, 그것도 모자라 또 과외공부를 한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은 철저하게 선생님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학교를 믿었고, 자식들을 자유롭게 뛰어 놀게 하였지요.
우리는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한창 뛰어 놀고 있을 아이들이 답답한 공간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지는 아닌지 보통 걱정이 아닙니다.
중학교에서 80, 90점을 얻은 학생과 100점을 얻은 학생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암만 생각해 보아도 저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문제풀이 훈련을 받고 100점을 받은 학생보다 혼자서 공부해서 80, 90점 받은 학생이 더 낫지 않을까요? 저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전 학창시절을 통틀어 어떤 상장(賞狀)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실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이만큼 누리고 살면 대단한 것이 아닌가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오로지 학창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모든 선생님들과 스승님의 훈육(訓育)의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훌륭한 부모님의 가정교육이 필수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불행하게도 저는 그런 부모님의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한(恨)이지만 말입니다.
어느 초등학생 소녀가 학교에 가자마자 담임선생님에게 길에서 주워온 야생화를 내밀며 이 꽃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꽃을 한참 보시더니“미안해서 어떡하지 선생님도 잘 모르겠는데 내일 알아보고 알려줄게!” 선생님의 말에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에 모르는 게 없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아빠에게 “아빠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주운 꽃인데 이 꽃 이름이 뭐예요? 우리 학교 담임선생님도 모른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런데 소녀는 오늘 두 번이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믿었던 아빠도 꽃 이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녀의 아빠는 식물학을 전공으로 대학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소녀를 담임선생님이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어제 질문한 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지요. 소녀는 아빠도 모르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알려준 선생님이 역시 대단하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젯밤 소녀의 아빠가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그 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그 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계셨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어린 마음에 선생님께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지요. 학교 교육과 가정교육은 백 년의 약속이며, 백 년의 미래를 위해 백 년의 시간을 준비하는 길고 긴 과정이 바로 교육입니다.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이 잘 연계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스승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면 이상적인 인성교육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라 는 우쭐함이 사회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너’라는 배려 속에 사회와 가정이 희망이 보일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性品)은 원래 청정하여 선과 악이 없습니다. 그런데 경계를 따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게 되지요. 선한 환경에 처하면 자연히 그 선에 화하기 쉽고, 악한 환경에 처하면 자연히 그 악에 물들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어머니께서 ‘삼천지교(三遷之敎)’를 행하신 것입니다. 0세부터 7세까지는 75%의 뇌세포가 연결 작용을 갖는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만일 이때 잘못 교육을 시켰을 경우, 그 유아(幼兒)는 「유아교육의 불환원성」 의 원리에 의하여 영영 되 돌이킬 수 없는 잠재적 기억력과 영향에 물들게 되어 앞날을 망칠 우려가 클 것입니다.
제발 우리 자녀나 손주 녀석들은 마음껏 뛰 놀면서 정신과 육신이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것이 수지맞는 투자가 아닐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