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애춘은 가랑비가 내리는 교정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허한 마음속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다시 밀려왔다. 심정수와의 정사로 자신은 갈 데까지 간 더러워진 몸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민 선생이 이런 나를 보면 어떻게 대할까!’
프로방스에서 마치 신부 앞에 고해성사하듯 애춘은 자신의 은밀한 모든 것을 토해냈을 때 지선의 그 깊고도 깊은 사랑의 빛을 보았다.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진지함과 동일시하는 따뜻함과 친밀함이 감동과 함께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희롱이나 조소가 없는 진정성을 보여주어 유일한 자기편이 된 듯 의지하고 싶었다.
애춘은 서서히 미술실로 향했다. 그녀는 깊은 상념 속에 잠겨 있더니 어느덧 이젤 앞에 앉았다. 지난날 무료함 가운데 이곳에서 그렸던 그림 한 장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바로 꽃과 나비의 산란함이었다. 갑자기 그것이 빛바랜 듯 초라하게 여겨졌다. 비루하고 난무하는 공허로 가득 찬 혼돈의 수평선에서 허우적거리던 자신의 내부를 인식하게 되었다. 왜 꽃과 나비만을 그리며 살아왔을까! 자신이 꽃을 그리고 있는 한, 호랑나비는 자신의 주위를 언제나 맴돌고 있는 듯했다. 애춘은 붓을 들었다. 푸른 녹색 계통을 그 위에 덧칠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특징으로 아울러 푸른 잔디가 되도록 바탕을 깔았다. 그리고 제일 윗부분에 그녀는 파란하늘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난 하늘 없는 그림만을 그렸을까! 온갖 꽃과 나비로 가득 차 하늘을 그릴 공간조차 없었다. 아! 하늘! 왜 나는 하늘과 해와 별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늘보다 깊고 음습한 음부만을 나는 바라보았다. 깊고 깊은 어둠의 세계로 자꾸만 침식되어 갔다. 음탕, 원망, 우울, 분노, 적대감…! 자신의 마음은 어두운 구름들로 가려져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스치는 붓 끝에 누군가 슬며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역시 호랑나비였다. 그 또한 삶의 무료와 혼란 속에서 지독한 음부의 계곡을 찾아 헤매는, 광란의 무도회를 그리는 호랑나비인 것이다. 애춘은 움찔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애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두운 주차장 근처로 두 사람은 이동했다. 밤안개가 짙었다. 몸을 숨기듯 빠른 동작으로 애춘을 자신의 회색 자가용에 밀어 넣었다. 그는 서서히 교정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애춘은 심정수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상념에 잠긴 듯하였다.
‘왜 꽃과 나비만 그렸을까?’
애춘은 말없이 어둠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아무 생각이 없는 멍한 초점을 잃은 눈빛이었다. 심정수는 운전을 하며 곁에 앉은 애춘을 흘끔 쳐다보았다. 애춘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차창에 시선을 두었다.
“이 봐, 학교에서 마주치면 왜 그렇게 나를 피하는 것이지? 정세원이라면 그랬을까. 2차, 3차로 쫓아다녔을 거야. 정세원…, 그 자가 어디가 그렇게 멋있다고 쳇….”
회색 승용차는 어느 덧 삼청동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밤안개는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사무실의 공기는 탁하고 스산스러웠다. 창가의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랑거리고 있었다.
“장애춘을 사랑하시나요?”
혜란의 음성은 사뭇 도전적이었다.
“아, 아니.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인간이지!”
“어쨌든 사모님과는 사랑했으니까 결혼했겠죠?”
“사랑? 왜 이렇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의미 없이 공허하게 들릴까!”
“사장님은 절 사랑하시잖아요!”
“그럼 결혼하잔 말인가!”
그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혜란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생각 중에 또 다시 결혼을 들먹거리자 두려움이 밀려오고 혼란스러웠다. 혜란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아니라 그냥 이대로 곁에 두고 싶은 여자였다. 결혼은 할 수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조건에 도박을 걸고 있었다. 야멸찬 혜란은 최고의 경영인을 꿈꾸고 있었다. 채성은 혜란에게서 고향의 여인을 향유하고 싶었다. 그것은 요즘 결혼정보회사에서 힘들게 ‘짝’을 찾고 있는 것과 같이〈조건 맞추기〉의 이해관계인 것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혜란도 독신주의를 주장하는 여자지만 그 역시 인간이므로 남자를 그리워하며 채성을 사모하는 것에 자신도 어쩔수 없었다. 혜란은 확실한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지내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