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 빚에 눌리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 급상승… 빚으로 생계 꾸리는 적자 가계 만성화
"1000만원 빌리면 한 달에 25만원꼴인데, 첫 달은 이자 안 내니까 둘째 달에 25만원만 내고…. 두 달만 지나면 돈 들어오니까 그때 갚으면 되지."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김교현씨(32·가명)는 한 저축은행 지점에 들어섰다. '무방문 무보증' '전화 한 통화로 쉽게' 같은 문구를 김씨도 떠올리긴 했다. 그래도 직접 가서 받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지점까지 들렀다. 대출금을 받았고 전셋집을 옮기는 데 썼다. 두 달 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집과 땅을 팔고 김씨가 있는 서울로 오시면 얼마간의 이자만 내고 끝날 문제였다. 그런데 계획이 빗나갔다.
하루라도 연체되면 전화 빗발쳐
부모님의 고향땅 거래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문중 재산이 얽힌 복잡한 사정 때문에 땅 일부를 떼어줬고 기간도 넉 달이나 더 잡아먹었다. 당장 생계비가 빠듯하게 돈을 버는 김씨의 주머니 사정에 급한 불이 켜졌다. 애초에 은행 대출이 되지 않아 저축은행까지 갔고, 저축은행에서도 최고 이율을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선심 쓰듯 첫 달 이자는 안 받았지만 저축은행이 6개월 동안 받아간 이자 액수만 125만원이었다. 하루라도 연체되면 전화가 빗발쳤다. 빠듯한 형편에 어쩔 수 없이 예상치 못한 25만원씩의 이자 지출을 해야 했던 넉 달 동안 김씨가 줄일 건 밥뿐이었다. 안 그래도 마른 김씨는 몸무게가 50㎏대까지 떨어졌다.
"누군가는 '고작 25만원?'이라고 할 수도 있을 돈이지만 그 25만원을 꼬박꼬박 내야 했던 4개월 동안은 피가 마르더라고요. 매일같이 집에 전화해서 땅은 언제 팔리냐고, 영락없이 빚쟁이 노릇을 하고 있더라니깐." 다행히 땅 판 돈이 들어와 김씨는 빚도 갚았고 이제 굶지도 않는다. 그래도 걱정이다. 혹시 자신이나 부모님이나 병이라도 걸릴까봐.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목돈 들어갈까봐.
한국은 1등이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또 하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계부채 늘어나는 속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난해까지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율은 17.7%에 달했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았고, 증가폭은 네덜란드 다음으로 컸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해 164.2%를 기록했다. 10년 연속 상승했다. 지난해 가계소득은 3.7% 증가했지만 가계부채는 6.2% 늘어났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수정 세계 경제전망'에서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두 달 만에 0.4%포인트 낮춰 3.3%로 제시했다. "한국은 높아지고 있는 가계의 레버리지(소득 대비 부채의 비율) 탓에 추가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처럼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가계부채 규모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인 부동산 관련 대출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규모가 작은 저소득층의 생계형 대출과 부채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떻게든 부동산 거래가를 높여 돈이 돌게 만들겠다는 정부 방침이 실질적인 시중금리 인하와 동결로까지 이어졌지만 다른 한편에선 내 집은커녕 당장 생계비를 위해 고금리의 소액대출을 받는 저소득층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생계가 달린 이 대출금리는 낮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저소득층의 가계부채 문제를 들여다 보면 다른 계층보다 더욱 심각하다. 실제 생활에 미치는 부채의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임진 연구위원은 '저소득층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소득 하위 20%인 저소득층에서는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이 120.7%에 달할 정도로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대출로 대출규모가 가장 큰 상위 20%도 금융부채가 소득의 100%를 넘겨 106.9%였지만, 저소득층일수록 갑작스러운 경제적 충격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험도는 배가된다.
목돈이 필요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지 않더라도 저소득층에서는 이미 빚으로 생계를 꾸리는 적자가계가 만성화된 양상이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도 소득 최상위층이 19.6%인 데 비해 저소득층에선 27.2%로 부담이 컸다. 소득 계층에 따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바로 빚을 낸 돈의 용처였다. 대출금 용도는 저소득층에서는 21.2%가 생활비 마련 목적인 데 비해 최상위층에서는 생활비에 쓰이는 비율이 3.7%에 불과했다. 바꿔 말하면 당장의 먹고 사는 것에 필요해 대출을 받기 때문에 저소득층 가구에서는 대출을 못 받거나 높은 금리의 대출을 받아야 할 때마다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셈이다.
저소득층이 주로 찾게 되는 높은 금리의 저축은행이나 소비자금융 외에 시중은행 가계대출의 자금 용도도 바뀌고 있다. 한편에서는 낮아진 금리에 따라 집을 사는 수요가 생기는 반면 '적자가계' 문제를 겪고 있는 저소득층에선 생계형 대출이 늘어나 대출의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2012년 3분기부터 2014년 4분기까지의 최근 10개 분기 '은행권 가계대출 자금용도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주택 구입 용도가 34.3%를 차지해 가장 높았다. 이어 기존 부채 상환(19.6%), 생계자금(19.0%), 전월세 임차(4.5%) 등의 순이었다. 이 중 분석 초기인 2012년 17%대 수준이던 생계자금 비중은 2013~2014년에 이르면 6개 분기 동안 20%를 넘어선 상황이 유지되면서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집을 살 수 없어 전월세로 거주하는 세입자들의 부담이 늘어난 점도 확인된다. 전월세 지불에 쓰이는 주택임차용 대출 비중은 2012년 3%대에서 해마다 높아져 4%대를 돌파했다. 이는 전셋값이 지속적으로 오르고, 그에 따라 월세가격까지 영향을 받게 되면서 세입자들의 부담이 커진 탓으로 분석된다.
금리를 낮추고 대출을 늘리면 부동산경기 활성화와 함께 경제 전반에 돈이 돈다는 정부의 정책 방향과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난 셈이다. 정부는 전체 대출을 늘리면 고금리 대출기관을 벗어나 낮은 금리로 갈아탈 수 있다는 입장을 폈다. 하지만 최재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개한 한국은행의 '차주 특성별 은행 가계대출 잔액 현황' 자료에 따르면 연소득 3000만원 이하 저소득층에서는 주택대출 규제완화가 이루어진 지난해 8월 이후 비은행금융권의 대출잔액 변동률이 0.0%로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고·중소득층에서는 각각 0.1%, 0.3% 줄어든 것과 비교되는 수치로, 결국 저소득층은 낮은 신용 때문에 여전히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 은행 외의 대출처를 찾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안심전환대출, 저소득층엔 그림의 떡
소득에 따라 가계부채 팽창의 여파가 다르게 나타나는 점 때문에 전문가들은 두 방향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전체 가계부채의 절대량이 집중된 부동산대책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부채 증가가 생계 위협으로까지 이어지는 양상에 대한 대책이다. 정부가 지난달 낮은 금리의 대출로 갈아탈 수 있게 한다며 내세운 '안심전환대출'은 사실상 자산이 없는 저소득층에선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해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금융연구원의 임준 연구위원은 "저신용·저소득층에 대한 대출은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충분히 원활한 자금을 중개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한국은행이 은행권의 저신용·저소득층 대출을 늘리도록 저리 자금 규모를 확대하는 등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