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볼때 주로 중국의 역사 무협대하드라마를 봅니다. 지금 보는 것은 <마르코 폴로>란 대하드라마입니다. 후일,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쓴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의 측근이 되어 맹활약을 펼치지요.
그런데 그 극중에 마르코 폴로의 무예스승인 무당파(武當派) 무인(武人)이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입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무인이 펼치는 무예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어 참으로 볼만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모양이나 색깔, 소리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고 좋은 느낌을 아름다움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뜻 보다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이란 풀이가 훨씬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철학의 분야인 미학(美學)에서는 아름다움을 ‘미(美, beauty)’ 또는 감각적인 기쁨이나 만족을 주는 대상의 특성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조화(調和, harmony)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고유(固有)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연의 사물 등에 대해 감각적으로 느끼는 소박한 인상으로부터, 예술 작품에 대해 갖는 감동의 감정, 혹은 인간의 행위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와 해석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의 극치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경지, 즉 대각일성(大覺一聲)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성현이라고 하는 서가모니 부처님, 공자(孔子), 노자(老子) 그리고 예수님이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도 마침내 우주의 진리를 깨치시고 대각일성이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배워서 되는 것도, 생각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깨달음 고유의 길이 있습니다. 개개인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각자의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서도 아니고, 또한, 강요에 의해서도 이를 수 없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지요. 부처는 부처의 방법대로, 예수는 예수 방법대로, 공자나 노자 그리고 소태산 부처님은 각자의 방법대로 수행과 고행(苦行) 끝에 대각에 이른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나는 나만의 고유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의 방법대로 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향해 달려가 마침내 대각일성의 대 함성을 외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의미요 또한 아름다움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은 봄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이 각각의 모습대로 꽃을 만개하듯, 깨달음의 꽃을 피우고,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깨달음도 때에 따라 피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배워서 깨달음에 나아가지 못하듯, 가르쳐서 나아가는 것도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깨달음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부처를 믿는 사람이든,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참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만, 부처를 따르는 사람은 불경(佛經)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해서 영향을 받고 또 예수의 가르침인 성경(聖經)을 수단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며, 소태산 부처님을 따르는 원불교인은 《대종경(大宗經)》을 길잡이로 해서 깨달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지는 깨달음의 모습도 각자의 생긴 얼굴만큼이나 또는 마음만큼이나 각양각색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석가모니 부처와 예수님, 소태산 부처님이 그리 하셨던 것처럼, 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가치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진실이고 아름다음의 극치일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종교나 한 분야에 깊이 통달하면,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하나의 진리로 합일(合一)되는 것입니다.
그게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은 것과, 예수님이 깨달은 것이나 소태산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혹 다르게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가르침의 끝에서는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 되어 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다르다는 편견으로 판단하는 자체가 아직도 깨달음의 높은 경지가 아닌, 배움과 가르침의 경지에서 맴돌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땅에서 올리는 정성과 노력이 있다면, 신(神)이 중심이 된, 신의 위치인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와 영광이 있어, 노력과 은혜가 서로 하나로 조화로이 어우러져 창조되어지는 것이 깨달음의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나 아닌, 남들을 이해하며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석가나 예수 그리고 소태산 부처님이 가셨던 길입니다. 보여 지는 아름다움보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요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 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이 눈에 안 보이는 소태산 부처님의 대각의 함성이 최고로 아름답지 않은 가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12월 3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