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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김덕권칼럼] 중도의 길..
오피니언

[덕산 김덕권칼럼] 중도의 길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11/29 02:47 수정 2017.11.30 08:27
▲ 덕산 김덕권 칼럼니스트

중도의 길

우리 [덕화만발] 카페에는 <4대 강령(綱領)>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덕화만발의 주인이 되려면 이 4대강령은 꼭 실천했으면 하는 뜻에서 제정한 것이지요. 그 <덕화만발 4대강령>을 다시 볼까요?

<덕화만발의 주인은 다음 네 가지의 강령을 지킨다.>

-.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종교 ‧ 이념 ‧ 정치에 편협하지 않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중도의 길을 가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제 성격 때문에 가끔 정치 분야에 중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중도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해 덕화만발 가족들의 충고를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걸 보면 아직 저의 수양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인 것 같아 여간 가슴이 아린 것이 아닙니다.

아마 부처님께서 중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우주의 진리를 대각(大覺)하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우리는 항상 나와 타인의 관계 사이에 서있습니다. 이 거미줄 같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미움, 배신과 질투 그리고 다툼을 경험하게 되지요. 때로는 알게 모르게 남의 관계 속에 끼어들어 피해를 입기도 하며 오해를 쌓기도 합니다.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중도’와 ‘긍정(肯定)’입니다. 아무리 남이 나에게 나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과 포용으로 그를 대한다면 그 역시 나를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마음과 부처를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선도 없으며 악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꾸로 선도 있으며 악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한 선과 악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인연을 엮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상 양극단의 편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정의당 김 모 의원이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상태를 언급한 아주대 이국종 교수의 행위를 두고 “의사는 그 병사의 상태에 대해 국민들에게 소상히 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수술 상황이나 그 이후 감염 여부 등 생명 위독 상태에 대한 설명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교수님은 예컨대 내장에 가득 찬 기생충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한 인간의 몸이 똥과 벌레로 오염되었다는 극단적 이미지는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뒤에 이어진 공포와 혐오의 감정도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라고 SNS에 적었습니다.

이밖에도 김 모 의원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지구에 사는 기생충들입니다. 이 병사를 통해 북한은 기생충의 나라, 더러운 나라, 혐오스러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생충의 나라 북한보다 그걸 까발리는 관음증의 나라, 이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북한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은가요? 한 마디로 말의 중도를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론이 비등하자 김 모 의원이 자신의 말이 중도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술을 맡은 이국종 교수에게 사과를 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중도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도란 서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때까지 6년 동안을 대부분 가혹한 고행의 도를 닦고 깨달으신 진리입니다. 극단적인 고행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서가모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가모니는 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는 중도에 설 때,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셨습니다. 이렇게 중도는 무엇에 집착하려고 하는 어떠한 일변(一邊)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진리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중도의 상태에 있음을 밝힌 것이지요.

이 중도와 비슷한 개념으로 ‘중용(中庸)’과 ‘중화(中和)’가 있습니다. 중용은 ‘성(誠)’과 ‘중(中)’을 천인일리(天人一理)로 설명한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중(中)’은 기울어짐이 없다는 뜻이고, ‘용(庸)’이란 영원불변이라는 뜻입니다.

또 중화에서 ‘중’이란 치우치지 않음입니다. 그리고 ‘화(和)’란 서로 감응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두 글자는 따로 사용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통합되었고 유가(儒家)에서 그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중화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서로 감응하며,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중화는 모든 생명이 본성을 다하고, 화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외의 갈등이 없으며, 천지의 변화와 함께 천지의 신묘한 이치(理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중화는 인간이 만물과 더불어 살되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소통! 그것이 바로 중화의 세계입니다. 중화는 우주만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중화는 천지만물이 때에 맞는 소통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중도의 길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양극단’을 경계하는 가르침입니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이른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삶이 중도행일 것입니다. 종교의 귀일처(歸一處)는《일원(一圓)》이고, 정치의 표준은 중도입니다. 과불급 없는 중도정치라야 시끄러운 이 세상이 안정되고 나라가 발전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도의 길을 제대로 걸어오지 못한 저의 처사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중도의 길을 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월 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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