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검찰도 성 전 의원도 애초에는 사건이 이렇게까지 치명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예상을 못했으리라는 점이다. 성 전 회장은 위기에 몰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검찰은 성 전 의원이 어마어마한 폭탄을 터뜨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은 알았을까, 이렇게 사건이 커질 줄
어찌됐든 사건은 터졌다. 성 전 의원은 지난 4월9일 새벽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이완구 국무총리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리고 윗옷 안주머니에 8명의 이름과 금품 액수가 적힌 메모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폭로한 8명의 인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구명 요청’ 거절당하자 정권 실세 8명 이름 담긴 메모 남긴 듯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3일 검찰에 소환돼 받은 질문이다. 그의 변호를 맡은 오병주 변호사는 “성 전 회장이 검찰에서 현장전도금 32억여원을 횡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듣고 당황해했다”고 말했다. 검찰에서 이런 진술을 한 사람은 이 회사 재무 담당 부사장이던 한아무개씨였다. 오 변호사는 “성 전 회장은 소환 조사를 받던 날까지도 한씨의 진술 내용을 몰랐다. 나중에 따로 복도에 나와 ‘한씨가 현장전도금을 횡령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성 전 회장은 한씨가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을 듣고 상당히 서운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의 한 측근은 “성 전 회장의 아들이 한씨와 갈등 끝에 회사에서 나갈 때도 성 전 회장은 한씨의 손을 들어줬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한씨의 진술 내용을 전해듣고는 큰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씨는 현장전도금 입출금 내역은 물론 성 전 회장과 나눈 대화의 녹취록까지 검찰에 제출해 자신의 혐의를 벗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성 전 회장은 “회사 자금은 한씨가 담당했다”며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내부자’ 덕분에 검찰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검찰이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한 것은 지난달 18일이다. 성 전 회장이 검찰에 출석한 것은 3일이다. 검찰이 매출 2조원 규모 기업의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해 총수를 부르는 데 걸린 시간은 16일에 불과했다. 포스코건설 비자금 수사와 견줘보면 속도 차이가 확연하다. 검찰은 경남기업보다 앞서 지난달 13일 포스코건설을 압수수색했지만 한달이 훌쩍 넘도록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을 소환하지 못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살아있는 기업과 죽은 기업”이라는 말로 이 차이를 설명했다. 포스코건설의 경우 회사 관련자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경남기업 쪽에서는 ‘협조자들’이 있다는 의미다.
궁지에 몰린 성 전 회장은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으려 했다. ‘성완종 리스트’ 등장인물 등 박근혜 정부 실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구명을 요청했다. 숨지기 하루 전인 8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취지의 기자회견까지 열며 대통령 측근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도 여론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튿날 정권 실세 등 8명의 이름이 담긴 메모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8명 가운데 홍준표 경남도지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7명은 모두 친박 핵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뿌리 깊다. 박근혜 정부 2기 청와대 비서실장인 김기춘 전 실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박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의 수사 검사로도 활약한 역사가 있다. 박 대통령과의 공식 인연은 2005년부터로 그가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며 시작됐고 지금까지 박 대통령의 곁을 지켜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허태열 전 실장도 1974년부터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도 2012년 대선 캠프에서 각각 당무조정본부장, 직능총괄본부장, 조직총괄본부장 등 자금과 조직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은 인물들이다. 이 가운데 두 명은 대선 승리 이후 광역자치단체장으로 당선됐고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도 당내에서 사무총장을 맡는 등 친박 핵심 가운데 핵심으로 분류된다. 이완구 국무총리와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도 오랜 친박으로 현재 박근혜 정권의 핵심 권력이다.
결국 이들은 과거 성완종 전 의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미래의 도움을 위해 돈을 쥐어줄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현 정권에서 성 전 의원이 구명 요청을 할 수 있을 만큼 실세로 올라서 있는 상황이었다. 성 전 의원은 죽기 직전까지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통해 도움을 호소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모두 성 전 회장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이것이 성 전 의원과 이들의 설명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부분이다.
결국 ‘성완종 리스트’가 의미하는 바는 성 전 의원이 죽기 직전 가장 배신감을 많이 느낀 이들의 이름을 메모에 남김으로써 개개인뿐 아니라 문제의 중심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까지 타격을 입힌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박 대통령에게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이미지 뒤에 숨지 말고 친박 세력들이 그간 저질러온 비리를 깨달으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검찰이 조준한 것은 MB 아닌 참여정부?
성 전 의원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검찰의 경남기업 수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추측이 나돈다. 우선 성 전 의원이 주장하는 것은 ‘표적 수사’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경쟁자로 생각한 이완구 국무총리가 반 사무총장과 가까운 사이인 성 전 의원을 치는 방식으로 반 사무총장을 견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 국무총리는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검찰의 단순한 ‘실수’로 여기는 의견도 있다. 검찰이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비리를 광범위하게 수사하다 경남기업의 비리를 발견했고 이것이 우연히 현 정권의 대선 불법자금 비리로 옮겨붙었다는 것이다. 경남기업이 검찰의 타깃이 된 것에 대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학연·지연 등 연고가 깊은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학벌이 없는 성 전 의원을 검찰 조직 안에서 막아줄 사람이 없었던 것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참여정부에 수사의 칼날을 들이밀기 위해 경남기업을 첫 번째 타깃으로 정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경남기업이 처음 해외 자원개발에 투자하기 위해 ‘성공불융자’를 받은 것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다. 또 성 전 의원은 노무현 정부 아래서 2번의 특별사면을 받았다. 검찰의 칼날이 애초 이명박 정부가 아닌 노무현 정부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성 전 의원과 친분이 있는 한 기업 관계자는 지난 “성 회장이 숨지기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검찰이 특별사면을 도와준 사람을 불면 선처해줄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고 (나한테) 얘기했다. 기자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말한 딜이 바로 특별사면을 도와준 참여정부 출신 등 정치권 인사에 대한 진술을 의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애초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검찰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위치에 서게 됐다. 현 정권의 핵심 인물들에게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일은 지금까지의 검찰 행태로 봐서는 쉽게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2012년 대선 불법자금 수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후폭풍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애초 검찰이 성완종 전 의원이 남긴 리스트를 숨기려 했던 정황도 검찰의 궁색한 처지를 대변해준다.
일단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 모양새를 갖췄지만 내부적으로도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을 구성한 지 나흘 만인 지난 4월15일 경남기업 전·현직 임직원 11명의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했다. 자금 공여자인 성완종 전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치자금법 위반이나 뇌물 수수 의혹 사건에서 필수적인 공여자 진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강제 수사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선 벌써부터 “누군가는 기소해야 하는 사건이지만 입증이 쉽지 않은 사건”이라는 말이 나온다.
검찰은 정황증거를 최대한 수집해 입증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성 전 의원이 자살 직전 윗옷에 남긴 메모지와
친박 아닌 홍준표 지사는 왜 언급했을까
현재까지 드러난 대로라면 이완구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성 전 의원의 한 수행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2013년 4월 충남 부여군·청양군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홍 지사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성 전 의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6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 경선을 앞둔
홍 지사에게 윤아무개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통해 1억원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홍 지사는 “성 전 의원이 나에게 금품을 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경남기업 재무 담당 임원인) 한아무개 부사장과 자금 전달책으로 지목된 윤 전 부사장 등을 상대로 홍 지사에게 자금이 실제로 전달됐는지를 따져볼 예정이다. 윤 전 부사장에게 자금을 직접 전달받은 이가 따로 있다면 그를 상대로 자금 사용처와 보고 라인도 함께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성 전 의원이 정권 실세로 분류되지 않는 홍 지사를 언급한 이유는 한 부사장이 이미 검찰 조사에서 홍 지사의 자금 수수 의혹 관련 진술을 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이들에 대한 수사보다 이완구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수사가 더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은 이들과 관련된 금품 수수의 정황이 비교적 구체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두 명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는 게 정치적으로도 가장 안전하다는 점이 감안됐으리라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다. 이 국무총리의 경우 이미 개인적으로 타격을 받은 상황에다 금품 수수 시점이 2013년 국회의원 재선거 때여서 박근혜 대통령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국무총리를 사퇴시키는 선에서 끝내면 정권의 정통성마저 건드릴 수 있는 대선 불법자금 의혹은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이 여권의 속내다.
김기춘·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경우, ‘성완종 리스트’에 언급된 내용대로라면 이들에게 정치자금법 위반죄(공소시효 7년)를 적용할 수 없다. 성 전 회장은 인터뷰에서 김기춘 전 실장에게 2006년 9월 10만달러를, 허태열 전 실장에게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7억원을 줬다고 밝혔지만 정치자금법 위반죄의 공소시효는 지났다. 이들에게 뇌물수수죄(1억원 이상 수수시 공소시효 10년)를 적용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수사 대상 야권으로 확장?
장기적으로는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에 한정짓지 않고 수사 대상을 야권까지 확장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4월13일 “야당도 같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며 새정치민주연합을 걸고넘어진 상황이다. 수도권 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성 전 회장이 억울한 심정에서 친박계 위주로 언급했지만 그들만 수사하면 ‘왜 우리만 수사하냐’는 반발이 심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다른 로비 상대들에 대해서도 전체적으로 안 할 수 없는 수사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