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부처다
부처는 깊은 산속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절이 산 속 깊은 곳에만 있지 말고 세상 한복판으로 나와야 한다’고요. 이는 부처는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고, 세상 속에 있다는 말씀과도 상통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나온 불교가 바로《원불교(圓佛敎)》인 것이지요. 따라서 세상으로 나온 원불교의 수행법이 바로 ‘네가 부처다’라는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곳곳이 부처요, 일 일마다 불공>이라는 뜻이지요.
옛날 순호 스님이 운수(雲水) 행각을 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이었지요. 겨울 한 철을 서울 밖 수유리 화계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기도하러 온 한 노 보살과 젊은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수근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 스님!” “저기, 저 홑껍데기 누더기를 걸치고 계신 저 스님이 누구십니까?” “아, 예 저 순호 스님 말씀이십니까요?” “예, 순(淳)자, 호(浩)자, 순호 스님이신데 도인스님이시랍니다요.” “아이고 그럼 저 스님이 도인스님이세요?” “예, 도를 깨쳐도 벌써 깨친 큰스님이십니다.” 순호 스님은 화계사에 머무르면서 누덕누덕 기워 입은 홑옷에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차림이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도를 깨치신 도인스님이라면서 왜 저렇게 누덕누덕 홑껍데기 누더기를 입게 하십니까요?” 거의 매일 기도하러 다니던 노 보살은 운호 스님의 헐벗은 모습이 몹시도 딱해 보인 모양이었습니다. 더구나 계절은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말입니다.
“그거야 스님께서 새 옷도 싫으시다, 겹옷도 싫으시다, 심지어는 버선도 싫으시다 아무리 새 옷 새 버선을 드려도 물리치시니까 그렇지요.” “아이고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절에 새 옷이 없어서 저러시나보다 하고 이렇게 솜바지 저고리에 버선을 해왔지 뭐겠습니까요,”
노 보살은 가슴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펼쳐보였습니다. 보기에도 윤기가 나고 푹신푹신한 옷가지였습니다. 수좌스님으로부터 새 옷을 받아든 순호 스님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나 입으라고 어떤 노 보살이 이 옷을 지어 오셨다고?” “거 정말 고마우신 보살님이시네 그려! 감사히 잘 입겠다고 전해주시게.”
“하온데 스님께서 정말 입으시게요?” “아, 입 다 마다! 정말 좋고 만!” “기왕에 따뜻한 옷이 생겼으니 이 옷 입고 서울 문안에 좀 들어갔다 와야겠네.” 새 옷에 새 버선을 신고 나간 순호 스님은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낮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간 순호 스님이 평소에 입던 홑 누더기보다도 더한 그야말로 알거지들이 입는 누더기 옷을 입고 돌아오신 것입니다.
“옷이야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밖에서 바꿔 입었네, 이 사람아.” “아니 그럼 새 옷을 거지한테 주시고 이렇게 거지 옷을 입고 오셨단 말씀입니까?” “자꾸 그렇게 거지, 거지 하지 말게. 내가 보기에는 떨고 계시는 부처님이셨네.”
원불교 교조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은 ‘처처불상’의 근거를《일원상(一圓相)》의 진리에 두셨습니다. 소태산 부처님은 일원상의 진리를 ‘법신불(法身佛)’로 표현하고, 이 법신불은 우주만유의 전체에 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내역(內譯)을 한 번 살펴봅니다.
첫째, 일원상의 진리는 우주만유의 전체적 진리이므로 만물 전체가 진리의 화신이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것은 우주만유를 신앙하는 것과 동일하며, 반대로 우주만유를 신앙함은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함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일원상의 진리는 지극히 공정하고 삿됨이 없는 인과(因果)의 원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만물의 생성이 가능하게 되며, 만물이 인간에게 죄 복을 내릴 수 있는 권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과진리의 보편성이 만물의 진리화현으로서의 권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만물을 무한한 위력을 지닌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원상의 진리는 무한 생성력인 은(恩)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을 우주만유 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를 천지 은 · 부모 은 · 동포 은 · 법률 은이라는 사(四恩)은으로 표현하여 나의 생존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처불상’의 의미가 드러나면 ‘사사불공’은 이에 따라 자연 새롭게 규정되는 것입니다. 불공(佛供)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으로 일종의 의식과 연결된 신앙행위를 뜻하였으나, 불(佛)의 소재와 의미가 진리적으로 규정됨에 따라 지금부터는 그 개념이 달라지 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부연해 봅니다.
하나, 진리적인 부처신앙과 진리적인 불공입니다.
즉, 진리적으로 부처님을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이는 미신신앙으로부터 신앙의 진리 화를 지향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 사실신앙과 사실불공입니다.
이는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인 만물의 각 개체 자체를 사실적으로 믿고 불공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만물의 개체적 성격을 존중하고 개성에 맞는 불공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을 진리의 화현으로 보려는 것이지요.
셋, 일체 불(一切佛)사상과 간단없는 불공법입니다.
일체가 부처이므로 시간과 처소에 구애됨이 없는 불공을 해야 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원의 진리 자체에 대한 진리불공과 생활 속에서 당면하는 모든 일들을 불공의 심정으로 대하는 ‘당처불공’이 겸전(兼全)되도록 하는 것이 사사불공의 특징입니다.
어떻습니까?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 ‧ 보신불 ‧ 화신 불’의 응화신(應化身)입니다. 마땅히 대하는 것마다 부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 마다 불공 법(事事佛供)이 아닌가요? 우리 모두가 부처입니다. 너도 부처 나도 부처! 우리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로 모시고, 관계마다 불공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면 어떨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1월 3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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