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통신넷= 심종완기자] 두 손으로 감싸 쥔 할머니의 손이 경련하듯 덜덜덜 떨린다. 입술도 마찬가지. 아흔일곱해를 버텨준 할머니의 몸은 이제 뜻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지난 달 할머니의 생신을 맞아 지역의 청소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찾아왔을 때에도 할머니는 무척 힘겨워했다. 아흔일곱 해를 상징하는 초들이 하얀 케이크 위에서 불을 밝혔지만 기력이 쇠한 할머니는 혼자 힘으로 그 촛불을 불어 끄지 못했다. 97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2월 7일 오후 김 할머니가 요양 중인 경남 통영시 도산면의 한 병원을 찾은 통영·거제 지역 청소년들이 할머니와 함께 생일 케이크 촛불을 껐다.
1918년 경남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21세가 되던 1939년 통영극장 앞에서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인 말에 속아 배를 탔다. 부산을 거쳐 중국에 도착한 할머니는 대련에서 3년, 다시 필리핀으로 끌려가 4년간 고초를 겪었다.
"그리 배타고 끌려가 한 고생은 말도 몬합니더. 억장이 무너져서 눈물도 한 방울 안 나오지요. 헤엄도 몬하는데 죽을 기라고 (바다에) 걸어서 들어갔어요. 물이 이만치 차오르는데 죽지도 몬하고. 억울한 이 마음이 죽을 때까지 안 낫지 싶어요."
그 모진 세월을 지나 할머니는 1945년 해방 무렵에야 필리핀에서 군함을 타고 귀향길에 오른다.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거치는 긴 여정 끝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2013년 3월 통영시 북신동 자택을 찾아 김복득 할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은 채 혼자 힘으로 걸어 중앙시장 어귀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구불구불 좁다란 골목길을 걸어 할머니의 집까지 가는 동안, 할머니는 두어 번 주저 앉아 쉬어야 했지만 연세에 비해 정정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백발이 된지 오래된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다시 흑발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가들과 담소를 나누던 끝에 할머니께 혹시 젊은 시절 사진이 있으신지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다 잃어버리고 한 장 남았다며 서랍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신다. 곱게 기모노를 차려 입고 찍은, '후미코'라 불리던 시절의 초상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조사를 위해 방한해 이날 김 할머니를 만난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학교 교수는 조심스레 그 사진을 촬영했다.
이제 할머니의 단정한 삶을 닮은 정갈하고 소박했던 그 집은 없다. 2013년 가을 할머니는 살림을 정리해 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병인 신경통과 관절염이 심해져 더 이상 홀로 지내기 어려워졌던 탓이다. 상태는 호전되는 듯 싶었고 2014년 여름, 할머니는 조금 더 나으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2014년 겨울에 만난 할머니의 상태는 훨씬 위중해 보였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아직도 버텨내는 중이다. 송도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대표'는 "할머니께서 늘 내 동생들(다른 피해자) 일본의 사죄도 못 받고 다 죽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 말씀하셨다"며 사명감으로 이겨내고 계신 듯 하다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 송 대표는 할머니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다 귓가에 속삭인다.
"어머니, 이제 곧 봄이 와요. 다시 기운 차리셔야지요."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송 대표의 뺨에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김복득 할머니는 지금 고단했던 삶의 끝자리에 서 있다.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도,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다. 산책은 커녕, 욕창을 막기 위해 누운 몸을 뒤척이는 일도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전의 그 환한 웃음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할머니를 대신해 누가 언제 물어도 한결 같았던 그의 평생소원을 전한다.
"일본이 사과를 한다면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하겠습니더. 우리는 했다카고, 즈그는 안했다카고 그게 원통해서. 일본이 사죄를 해야 죽어도 눈을 감겠다, 내 해원을 풀어주는 게 그게 제일 아니겠습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