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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개인과 대중에 끼친 영향..
문화

종교와 사회, 개인과 대중에 끼친 영향

권성찬 기자 입력 2017/12/03 21:09 수정 2017.12.03 21:44

[뉴스프리존=권성찬기자]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살면서, 사회적인 인간이 되는 지점에서 시작이다. 종교는 사람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시작이다.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고, 자연은 왜 이렇게 인간을 괴롭히는지, 나쁜 사람들이 왜 잘 사는지, 사람은 왜 죽는지, 죽은 후엔 어떻게 되는지… 사회가 발전하면 종교는 쇠퇴할 것이라는 생각은 서구 근대 계몽주의의 한 가지 흐름이었다. 그러나 종교는 현대의 다양한 문물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먼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보면,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 있었던 갈등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지지했을 당시 가톨릭교회가 종교 재판을 통해 내린 결정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지동설을 발표한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 신부로서 지녔던 강렬한 종교적 신념이 그를 지동설의 혁신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면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원래 교회도 당연시해 왔던 기존 학설로서의 천동설이란 땅에서 하늘을 바라봤을 때 태양과 행성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작성한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난삽한 그림으로 행성들은 큰 축으로는 태양을 따라가면서도 다시 그 축을 중심으로 작게 돌면서 앞으로 가다가 뒤로 가고 또 다시 앞으로 가는 등 여간 들쑥날쑥한 것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의 움직임을 태양 쪽에서 바라본다면 태양을 중심으로 깔끔한 동심원의 체계가 그려진다는 점에 착안했는데, 신은 단정한 모습으로 천체를 움직이게 하였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그를 지동설을 주장하도록 추동했던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많이 밝혀지면서 종교가 답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점점 작아졌다. 그러면서 종교만이 답할 수 있는 부분, 종교의 본질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종교 자체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이었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교와 사회는 분리되기 시작했다. 종교는 영적인 면을 담당하고, 사회는 삶을 담당하게 됐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와 권력인 사회도 있다. 역사와 함께 종교와 사회가 분리됐다는 관점에서 보면 원시적 사회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한국과 캐나다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 분리되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교는 사람들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고, 반대로 세상의 현실들은 종교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인간이 종교적이며, 동시에 세상을 살고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공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다. 공민종교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선보인 개념이다. 루소는 공민사회를 정신적으로 통합시키는 역할의 종교를 공민종교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게 공민사회의 법치에 따를 것을 명하는 예지와 섭리를 지닌, 이지적이면서 자애로운 신을 국민들이 믿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공민사회에 대한 각자의 의무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줄 것으로 봤다. 하지만 루소는 기독교에 공민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여겼는데, 중세의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인 개입을 해온 역사 때문에 국민의 일반의사에 의한 국가적 통합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자체보다는 그 정치적 간여의 역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루소의 낡은 공민사회 개념을 꺼내 본격적인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킨 미국의 사회학자 벨러는 기독교가 미국인들이 그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신봉케 하는 공민종교로 이어지고 있음을 역설했다. 예컨대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이 그들의 정치 연설에서 자주 언명하는 ‘신’은 바로 공민종교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 신은 기독교적 덕목 대신에 인권, 자유, 평등 등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을 구현할 것을 미국인들에게 명한다. 미국인들은 신에 의해 사명이 부여된 스스로에 대해 강한 자존의식을 갖는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분석하면서 벨러는 가톨릭 신도였던 케네디 대통령이 말한 신이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와 유태교 등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미국 국민들도 다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신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공민종교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기저에 깔고 있음도 강조했다. 여러 제도종교 및 교파에 속해있는 미국 국민들이 그들의 종교를 받드는 헌신적 신념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를 같이 받든다는 것이다.

▲ 종교차별 규탄 범불교도대회’가 27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주최로 열렸다. (사진:뉴스프리존DB)

종교적 신념이 현대적 문물의 하나인 자본주의 체계를 지원한다는 사실에 관해 독일의 사회학자인 베버가 계명한 바 있는데, 그 점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베버의 관점에 대한 오해 또한 광범위하게 유포돼 있다. 베버는 기독교에 내포된 금욕적 합리성이 근대 서구에서 합리적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수도원 등 종교적 세계에서만 집중적으로 추구되던 중세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근대 세속적 세계에까지 확산돼 추구된 결과, 경제 양식도 금욕적 합리성을 띤 자본주의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단순히 교파간의 평면적인 비교를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 일어난 역사적 변화에 대한 통시적인 고찰을 했다. 그리고 베버는 그것을 사회의 여러 제도들과 같이 보면서 종교를 포함한 각 제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일어난 변화들을 입체적으로 고찰했다. 종교와 경제 사이의 관계만 해도 베버는 역으로 경제가 종교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했던 것인 바, 이 점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베버가 오로지 종교가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을 1종 오해라고 부를 수 있다.

베버가 입체적인 고찰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은 1종 오해를 불식했다고 자부하지만 2종 오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정에 빠져 있다. 베버가 비록 모든 제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입체적으로 고찰했지만 그 속에서 종교의 위상을 가장 높이 봤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베버는 종교가 경제 같은 다른 제도에 미치는 영향이 그것들로부터 받는 역방향의 영향보다 일반적으로 더 강한 것으로 봤다. 종교와 경제 등 다른 제도 사이에 상호적이긴 하지만 비대칭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베버는 수많은 실체적 연구들에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기독교의 금욕주의에 의해 본 궤도에 오른 고도 자본주의의 시기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작동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움직이기 위해 기독교의 금욕주의를 계속 더 필요로 하는 것은 꼭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베버는 그것이 탈바꿈하거나 재강화되는 형태를 포함하는 복잡다기한 종교적 지평을 미래 속에 흘낏 바라보았는데,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종교의 부활’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현실 속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기준은 '진리'이다. 세상의 기준은 '상식'이다. 진리와 상식은 겹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면은 진리가 상식을 초월하고, 또 상식은 진리에 비해 영향력의 범위가 넓다. 진리는 타협이나 수정이 불가한 것이지만,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면 상식을 따라야 한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기에 상식과 부딪힐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와 상식이 부딪히는 일이 있다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이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것이거나, 상식이 불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제 경험상 대체로 상식이 틀리는 경우 보다는 본질이 아닌 것을 진리의 본질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늘 옳은 것이요, 상식은 시대와 지식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정의와는 상반되는 현실의 현상입니다. 종교가 진리 외적인 부분을 자꾸 진리라고 우기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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