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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
기획

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77회

한애자 기자 haj2010@hanmail.net 입력 2017/12/11 04:44 수정 2017.12.12 08:08

발견

혜란이 꼼꼼히 주문하고 있을 때 채성은 출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두 남녀는 팔짱을 끼고 채성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아버지와 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의 음흉스런 웃음과 여자의 상기되고 들떠 있는 표정이 관계를 말하고 있었다. 그 다음 순서는 모텔이나 호텔로 향하고 있으리라. 그 때였다. 애춘이 웬 사나이와 힘없이 들어서고 있었다. 채성은 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주치고 알아보면 낭패인 것이다. 그는 아찔했다. 다시 한 번 그들을 훔쳐보았다. 두 남녀는 아까 그 남녀가 앉았던 왼쪽의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채성은 애춘보다 동행한 남자를 탐색했다. 그의 눈이 심정수에게 고정되었다. 남자는 준수한 외모였다. 애춘의 태도도 사뭇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애춘의 태도는 항상 먼저 치근거리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지못해서 따라온 듯 시큰둥한 그런 분위기였다. 그녀의 눈에는 정열이 없었으며 담담한 모습이었다. 늘 남자만 보면 반짝이던 눈동자와 헤 벌어진 입으로 행복해 하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애춘은 사뭇 여유 있게 남자를 대하고 있었다. 또한 남자를 호리려고 야한 웃음소리로 깔깔거리는 욕정적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진짜 애인?’

채성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춘의 의외의 모습에 자꾸 꼬리를 물고 연상하기 시작했다.

“누구 아는 사람 계세요?”

혜란이 채성을 살피며 물었다.

“아, 아니!”

그는 목이 타 냉수를 냉큼 들이켰다. 혜란에게 저들이 보여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바심이 밀려왔다. 다행히 그들은 혜란과 등진 자리였다. 곧 웨이터가 주문한 스테이크를 써빙하여 접시가 진열되고 있었다. 채성은 시장기가 발동해 향긋한 크림스프를 입에 먼저 넣었다. 고소한 맛이 식욕을 당기는 듯했다.

“맛있군. 어서 들어요!”

혜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의연하게 행동했다. 혜란은〈애수〉에 관한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의 연기며 그리고 자포자기, 타락, 죄책감, 그 슬픈 사연들을 얘기 했지만 채성은 들리지 않았다. 듣는 척하면서 아내 쪽의 기미를 살폈다. 사내는 테이블에 오른쪽 팔을 내밀며 애춘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다. 은근한 남자의 눈빛이 유혹하는 분위기였다. 채성은 그의 인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혜란과 등지고 있었고 자신은 정면에서 남자만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애춘은 채성을 등지고 있어 눈에 뜨이지 않았고 혜란의 눈에도 뜨이지 않아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채성은 계속 혜란의 영화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오십대로 보이는 사나이를 다시 살폈다. 다분히 바람기와 건달기가 있는 남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애춘의 꼿꼿한 자세는 상대방에 대해 흥미 없는 담담한 태도였다. 의외로 냉담하고 침착해 보였고 오히려 사내 쪽에서 몸을 자주 움직이며 안달이 나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사내는 애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듯했다.

창밖의 가을밤은 안개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곧 가을의 분위기가 흠씬 풍기는 추억의 가요가 울려 퍼졌다. 그는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 했으나 워낙 거리가 있고 음악소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저,〈애수〉의 그 워터루 다리 말이에요. 그곳을 걸으며 자포자기의 절망 속에서, 마이라는 거리의 여자가 되어 남자들을 유혹하며 몸을 파는 타락으로 치닫게 되고… 절망 속에서 여자는 쉽게 타락으로 빠질 수 있나 봐요. 천사가 음녀가 될 수 있는 것, 좌절이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그때의 비비안리의 연긴 정말 잘 했어요….”

혜란은 추억의 영화에 몰입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여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싶다, 그 베레모 모자도 한 번 쓰고 싶다, 오해와 어긋난 운명의 비운의 사랑이 어떻고, 남자 주인공의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과 그 진실이 어떻고…, 채성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망을 하게 되면 여자는 쉽게 타락하게 된다고?”

혜란이 눈치 챌까 봐 맞장구치며 다시 물으며 애춘을 살폈다.

‘나 애춘은 이제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듯 초연하고 담담한 자세였다. 그녀에게 경이로움이 샘솟고 있었다. 그 태도는 이제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요조숙녀 같았다. 이때 애춘이 고개를 들어 잠시 천장을 응시하였다.

“절망이 참 무서운 거야….”

채성은 애춘을 절망으로 몰아붙인 범죄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여자뿐인가요? 인간은 좌절하게 되면 희망은 사라지고 자포자기식으로 이성을 잃어버리죠. 사모님도 아마 절망이 깊어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겁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을 지키는 여자. 그 여인이 혜란이길 바라오. 세상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다 타락하는 것은 아니야. 나약한 인간들이나 그렇지!”

“다음 달 출국 준비는 김 실장에게 내가 부탁해 놓지!”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란은 유리컵에 와인을 따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어머! 이 와인 정말 맛있어요! 사장님과 식사할 때마다 꼭 이 아름다운 색깔과 달콤한 맛의 와인을 먹고 싶었어요!”

혜란은 와인을 채성에게도 따랐다.

“혜란의 성공을 위하여!”

“사장님의 행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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